‘장애가 있는 대학생’ 하면 줄줄이 따라오는 말들이 있다. “어려운 환경을 훌륭하게 극복했구나!” 또는 “대단해, 다른 학생들처럼 팀플과 발표를 해내다니.” 그러나 청각 장애를 가진 김초엽 학생은 이러한 칭찬과 주목을 원치 않는다. 다음은 김초엽 학생의 글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인데,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이런 대회에 참가한 것을
칭찬하고 싶어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주최한 행사 ‘내 연구를 소개합니다’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연구를 짧은 시간 동안 청중들 앞에서 소개하는 스피치 대회였다. 예선에서 스크립트를 제출했고, 본선에 진출하게 됐다. 리허설도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청각장애인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상황과 필요에 따라 내가 장애인임을 말한다. 심사위원 분들에게는 질의응답 시간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미리 전달해뒀다. 무대 위에서 청중들에게 굳이 내가 청각장애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발표 과정에 특별히 ‘듣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표는 무사히 끝났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이 내 발표가 끝난 다음, 갑자기 청중을 향해 말했다. “방금 발표한 학생이 발음이 어색하다고 느꼈을 수 있는데,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입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참가한 나를 칭찬하셨다.
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그분이 이야기하는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혹시 내 발음이 너무 불분명해서 저런 해명을 하셔야만 했던 상황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직접 말하는 게 나았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일은 수상 발표 때였다. 아까 그 교수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교수님은 내가 무대에서 하지 못한 말이 있을 거라고하셨다. 이곳에서 나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거듭 언급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마이크를 다시 되돌려 드렸다. 그러자 교수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초엽 학생은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인데,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이런 대회에 참가한 것을 칭찬하고 싶어요. 심사위원들도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청각장애인으로서 이 대회에 참가한 게 아니었다. 할 말이 있으니 마이크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청중 일부가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그 환호에 말문이 탁 막혔다. 나는 왜 방금 박수를 받은 거지? 사람들은 내게 무슨 이야기를 기대하는 걸까? 장애를 극복하고 용기를 내서 스피치 대회에 도전한 감동적인 이야기?
나는 방금 하신 말씀이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말은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모두가 즐기는 대회를 이런 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본선 진출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한 참가자였는데도, 이미 수백명 앞에서 용기를 내어 대회에 도전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장애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듣게 된 이유에, 분명한 사회적 맥락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엽아. 너를 칭찬하는 말들 앞에는 항상 ‘역경을 극복하고’ 같은 말이 붙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네. 어쩔 수 없나봐.”
얼마 전 나는 TEDx 행사의 연사로 초청 받았다. 행사의 주제는 ‘unlimited’였다. 무대에 올라간 나는 이렇게 강연을 시작했다.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고주파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대화를 할 때는 항상 입모양을 봐야 하죠. 제가 이런 식으로 저를 소개하면서 시작하면,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아, 저 연사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취를 이룬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지만 나는 그날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 연사 초청을 받았을 때, 학부 시절 했던 여러 활동들과 나의 신체적 한계를 연관지어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들었다. 초청을 받은 이유에는 ‘장애’가 포함되어 있겠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내가 이미 아주 많이 들어보았던 요청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자기소개서에 쓸 게 많았다. 어릴 때는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공부도 잘하고 꿈도 있는 야무진 소녀였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기특해했다. 청력이 나빠지면서는, 어른들이 내게 칭찬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대견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장학금도 상장도 많이 받았다. 입시 면접을 가도 면접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어느 날부터는 그 친절들이 조금씩 불편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는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서 온 힘을 쏟는 사람’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런 일은 이어졌다. 포항공대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홍보팀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인터뷰를 한 뒤에 나온 기사는 이랬다. “신경성 난청 딛고 포스텍 관문 뚫어…”. 역경을 당당히 극복하고 포항공대에 들어온 신입생의 이야기였다.
작년에는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다. 홍보영상에 출연해달라고 했다. 내가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유는 듣기도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장애를 너무 부각하지 말아달라고 말했지만, 어쨌든 ‘딸의 역경에 마음 아파하는 아버지’, ‘이런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성취를 이루어낸 수상자’와 같은 감동적인 연출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들장미 소녀 캔디와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어려움을 극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나는 장애인이면서 글도 쓰고 대외활동도 열심히 하는 기특한 대학생이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학생이다.
하지만 장애를 언급하는 순간, 항상 그것으로 주목받았다. “자, 봐요.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훌륭하게 해내는 학생이 있잖아요?” 때로는 나 자신이 도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노력 지상주의와 역경 극복의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
사람들은 다큐멘터리 속의 장애인을 보며 감동한다. 어느 날 돌이켜 보니 내가 그 다큐멘터리 속의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 승리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남들과 똑같이 울고 웃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속의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의 삶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대상화되었다. 졸업할 땐 학교의 명예에 기여한 학생에게 주는 ‘무은재 상’을 받았다. 받은 상장에는 나의 학부 시절 활동들을 칭찬하는 말 앞에 ‘어려움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아빠는 내가 상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상장을 보고는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초엽아. 너를 칭찬하는 말들 앞에는 항상 ‘역경을 극복하고’ 같은 말이 붙네.”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네. 어쩔 수 없나봐.”
남들과 같은 삶의 수준을 누린다는 이유로 칭찬 받고 싶지 않다.
발표 행사가 끝난 다음 그 심사위원 분과 독대하여 내가 생각했던 문제를 말했다.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다. 대면해서 이야기했고 메일도 보내주셨다. 교수님은 나를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만약 참가자 중에 목감기에 걸린 학생이 있었다면, 목감기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끝마친 그 학생을 칭찬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불행한 일들의 뒤에는 선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분 개인에 대해 더 항의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정말로 ‘목감기에 걸린 학생’과 ‘청각장애인’은 같은 층위일까. 정말로 내가 감기에 걸린 학생일 뿐이었다면, 마이크를 넘겨받으면서까지 나의 상황에 대해 두 번이나 설명할 기회를 받았을까. 정말로 감기에 불과했다면, 그때도 어떤 청중들은 내가 마이크를 넘겨받았을때 환호를 보냈을까. 박수를 쳤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수단화되었던 많은 상황들에서, 이 맥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건 나와 우리가 수없이 겪어왔던, 그리고 겪게 될 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에 작은 균열을 내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우리와 주류를 구분하는 소수자성에 주목한다. 여성, 장애인, 유색인종, 우리는 라벨링되고 분류된다. 내가 무엇을 성취하든 사회는 그곳에서 ‘장애인’으로서의 성취를 본다. 그러나 우리의 소수자성은 단지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타자이기 전에, 소수자이기 전에,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함께 울고 웃고 노력하며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우리의 소수자성에만 주목하는 것은 우리를 소외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이 설령 우리를 칭찬하며 대견하고 기특하게 여기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 시선에는 시혜적 태도만이 있을 뿐, 정말로 우리의 삶을 ‘보통의 사람들’과 동등한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태도가 없다. 우리는 남들과 같은 삶의 수준을 누린다는 이유로 칭찬받고 싶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도전이고 용기이며, 또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특별히 일컬어 도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그들을 위해 ‘소비하는’ 방식이다.
무엇이 이 일상을 ‘도전’으로 만드는가. 장벽을 넘어선 개인들을 역경 극복의 미담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삶을 도전으로 만드는 장벽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사회를 상상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호주의 저널리스트 스텔라 영의 말을 빌린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성취를 평가해주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리의 앞에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극복하고’를 붙이는 대신에, 어떻게 그 수식어를 뗄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살고 싶다. 그건 그렇게 대단한 꿈은 아니다.
Freelancer_김초엽(포항공과대 화학 석사과정 16) facebook.com/choyeop.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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