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1월 1일엔 잊지 않고 챙겨야 할 생일들을 새 달력에 옮겨 적으며 보낸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한때 절친했지만 일 년 새 멀어져, 이젠 내 사람이 아닌 이의 생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땐 잠시 머뭇거리다 칸을 비워둔 채로 책장을 덮는다. 길에서 우연히 옛 애인을 마주친 것마냥 쓸쓸한 기분으로.

 

 

문득 A가 생일 축하 카드에 적던 단골 멘트가 떠올랐다. “할머니 될 때까지 잘 부탁해 친구야”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멀어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한 친구와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전하기 껄끄러운 사이가 돼버렸다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음이 쓰린 일이다.

 


 

우정은 식물과 비슷하다. 햇빛, 온도, 습도. 알맞은 환경이 갖추어져야 무리 없이 잘 자란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활은 우리의 우정이 자라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같은 과. 같은 동아리. A와 나는 잠자는 시간 빼고 항상 붙어있었다. 같은 톱니 바퀴 안에서 구르고 있던 우리가, 서로의 속마음까지 알아챌 수 있었던 건 당연한 일었다.

 

연인보다 가까웠던 관계는 우리가 각각 다른 바퀴로 이동하며 어긋나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잡지사의 수습 기자로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사회생활이 너무 가혹해서 매일 울었다.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한 때였다. 안타깝게도 하필 그 무렵 A는 첫사랑의 아픔을 딛고 이제 막 새 사랑을 시작한 참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애인과 함께 간 카페가 얼마나 예뻤는지, 어떻게 싸웠고 얼마나 극적으로 화해했는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A가 야속했다. 입으론 웃으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난 어제도 밤 샜는데… 턱 끝까지 내려온 내 다크서클엔 관심도 없네…’ 마찬가지로 뒤늦게 든 생각이지만, 아마 A는 오랜만에 되찾은 자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지 않는 내게 서운했을 거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가 간절하게 필요했고 그랬기 때문에 상처받을 수 밖에 없었다.

 


 

변화된 생활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우리의 가치관은 이전과 달라졌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졌다. 대화는 어색한 웃음이나 추억팔이로 간신히 이어졌다. 그래도 친구니까 의무적으로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SNS에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마음은 멀어졌지만 A와 나는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절친 사이였다.

 

 

문제는 A를 만나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는 거다. 남은 건 자괴감뿐이었다. 그렇게 자괴감에 휩싸였다가도 막상 A의 전화가 오면 숨이 턱 막혀서 괴로웠다. 어느새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A의 연락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관계는 끝났다. 무책임하고 찜찜하게.

 

‘그때 좀 참았다면, 우리가 아직 친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따위의 낭만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관계가 그런 식으로 끝난 것은 미화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한때 삶의 일부였던 친구를 기만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설명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1년 가까이 ‘진짜 친구’ 코스프레를 계속했다. 분명히 그 어설픈 연기는 A에게 상처를 줬을 거다.

 

사람들은 다른 관계가 변하는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유독 우정이 변한다는 사실만 낯설게 생각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첫 우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상하다. ‘십년지기’, ‘평생 우정’ 좋은 친구를 묘사할 때 쓰는 말 대부분에는 긴 시간을 함께했다는 의미가 포함돼있다.

 

결국 난, 영원한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우정을 연기했던거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왠지 못난 사람이 될 것만 같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환경이 변하고 그에 따라 주변 사람들이 바뀌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땐 왜 그렇게 ‘영원한 우정’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운 셈이다. 세상 모든 관계가 그렇듯, 너무 괴롭다면 그만해도 괜찮은 걸. 그게 우정이라고 해서 예외일 필요는 없다는 걸.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때 우정이었던 것은 변질되어 우리를 지치고 아프게 할 거다. 마치 나와 A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게 A와 다시 멀어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바닥났다는 걸 알았을 때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다. 어렵고 슬프겠지만 꼭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illustrator 백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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