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과하게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난 그냥 향이 좋아서…” “그게 아니잖아요? 온데 향수를 뿌리지 않나? 향수 하나 뿌렸다고 영국 해변이 떠오른다고 하질 않나.”

 

사실 그녀 말이 맞다. 조 말론 런던의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를 사고 심하게 뿌려댔다(이것도 PPL? 그러나 무척 비쌈). 옷이든 침대에든. 킁킁 향을 맡으면, 신기하게도, 영국의 어느 조용한 시골 해변이 ‘공감각적으로’ 떠오른다. 흐린 하늘, 대충 자란 풀이 듬성듬성 있는 모래밭, 불어오는 바람에선 바다 내음이 가볍게 묻어 있다. 영국산 향수 하나에 이렇게 빠지게 되다니. 신기한 일이지만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조 말론 우드 세이지 앤드 씨솔트 향수. 코에 대는 순간 영국 시골 바닷가의 향기가…죄송

올해 초 나에겐 몹쓸 병이 찾아왔다. 2월 말쯤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5월엔 병세가 완연해졌다. 여름내 끙끙 앓았고, 9월엔 정점을 찍었다. 증상을 처음 자각했을 때 나는 꽤 놀랐는데, 증상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증상이 심각해진 이를 여럿 보았다. 한 친구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한 번 병이 들더니 아주 꼴도 못 보게 변해서 마음이 아팠다. 놀란 건 발병 자체가 아니라 병의 주요 원인이 내 기질과 아주 동떨어져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병명은 ‘생각병’이다. 말 그대로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병이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떠올리며 현재를 소모하는 게 주요 병증이다. 생각병 환자는 눈앞에 모듬회가 나와도 맛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가 곁에 있어도 소중한 줄 모른다. 심지어 귀한 술 앞에서도 푸념만 내뱉는다. 정신이 이미 내 앞에 있는 것들을 떠나, 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들과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슬픈 미래로 향한 탓이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지난달 벌어졌던 모욕적 상황, 화가 났으나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헤헤 웃다가 지금 분노로 치를 떠는 그때의 기억이 생각병 환자를 괴롭히고 있다. 아직 졸업이 2년이나 남았지만, 백수가 될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며 두려워하는 하는 생각병 환자도 있다. 나는 원래 생각 없이 사는 스타일이라서 생각병 환자들이 끙끙댈 때는 속으론 대체 무슨 짓이냐며 비웃어왔다. 그날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과거를 후회하고, 어두운 미래를 떠올리며 현재를 소모하는 ‘생각병’…

 

추운 기운이 사라지던 어느 봄날 아침, 병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정도였다. 샤워하면서는 권태감을 느꼈다. 매일 보는 사람들, 매일 가는 직장이 지겹게만 여겨졌다. 커피를 마실 땐 좌절했다. ‘나는 왜 20대 때 많은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젊음을 다 날렸을까.’ 커피가 무척 썼다. 회사행 자동차에선 미래를 비관했다. ‘내 삶의 가능성은 이제 사라졌어. 나만의 무언가를 남기지 못할 거야. 그냥 그런 아저씨가 되어버릴 거야.’ 사무실 의자에 앉았을 때 나는 무언가 두고 왔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건 삶의 의미였다. 집에 두고 온 건 아니었다.

 

4월쯤부터 나는 더 이상 내 앞에 남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확률적으로 볼 때 타당한 추론이었다. 기업 입사-결혼-아이, 란 테크트리를 충실히 밟은 주변 30대 친구들이 “세상 뭐 있냐. 아이 얼굴 보는 낙으로 사는 거지”란 말을 참 자주도 하였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라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들을 패배자로 생각하며 내 인생을 돌아보다가 딱히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취업을 했고, 결혼하고 집도 샀다. 이제 대충 돈을 벌고 놀다가 기력이 쇠하면 은퇴를 하고, 등산 다니다가 생을 마감하는 삶.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여름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넘어가자. 중2병에 빠진 30대 남자의 찌질한 일상을 20대 독자가 좋아할 리가 없다. 별로 신선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야기를 건너뛰어 결론을 말하자면 10월쯤 되자 생각병은 ‘치유’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응?

 

생각병의 치료해준 건 ‘지금’을 즐기는 태도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과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있는 힘껏 즐기는 것이다. 앗, 독자의 비난이! “지금을 즐기라니! 심리 치유 에세이에 나올 법한 뻔한 이야기 때문에 이제껏 읽은 것이냐. 내 눈의 피로를 풀어내라.” 꼭 아닌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디테일이다. ‘지금주의(지금을 누리자는 주의)’는 혼자 힘으로 안 된다. 액션 롤플레잉 게임처럼 조력자가 필요하다. 마법사, 전사 이런 건 아니고, 그저 지금에 집중하게끔 할, 지금을 힘껏 즐기고 있는 친구면 된다.

 

생각병 극복은 혼자로는 힘들다. 지금을 힘껏 살아가는 바보들이 필요하다

 

그리 덥지는 않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문득 나는 ‘친구를 사귀어야겠어’라는 욕구를 느꼈다. 그건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시작했다. 우리가 친구 삼는 모집단은 너무 좁다. 중고등학교 같은 반 혹은 대학교 같은 전공, 기껏해야 동아리 정도다. 취향과 스타일을 고려하지 않고 조성된 협소한 집단이 우리의 친구 풀이다. 게다가 사람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21살엔 서로 잘 맞았던 친구가 26살엔 맞지 않는 일도 흔하다. 옛 친구 말고도 세상에 나의 지금 상황과 맞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여하간 추억만 곱씹으며 술잔 부딪치는 건 생각병 극복에도 좋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맞는 새로운 일들을 벌일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게 필요한 이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사회 통념에서 자유롭고, 술을 많이 마시며, 똥멍청이 짓거리로 서로 소통하는 ‘바보’들이면 충분했다. 너무 디테일하다고? 솔직히 처음부터 이렇게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니다. 우연히 알게 된 ‘바보’들에게 푹 빠졌고 돌이켜 생각했을 때 그렇단 말이다. 친애하는 바보 중엔 술만 마셨다 하면 난리 피는 기타리스트 C가 있고, 음담패설을 즐기는 미녀 H가 있다. 어릴 적 많이 방황했지만, 그 방황을 독실한 지금주의(“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즐기자”)로 극복해낸 이들이다.

 

평소 낯가리던 성향을 버리고 내 쪽에서 열심히 들이댔다. ‘난 너의 이런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라는 초등학생스러운 문자를 보내기도 했고, 때론 전략적으로 내가 가까워지고픈 사람들을 술자리에 모았다. 다행히 상대도 내게 넘어왔고 차마 대중 매체에서 표현하기엔 애매한(?) 재밌는 일들을 많이 벌였다.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한 장면은, 조용한 영국 해변에서 가족과 친구 무리가 함께 보내던 모습이다. 아무 고민 없이 지금 그 순간만을 흠뻑 즐기던 그 해변풍경이 내 상황에 오버랩했다. 직장, 돈, 육아 같은 현실의 관성은 아마 바보들을 하나둘 비(非)바보로 망쳐놓고, 우리에게 둔감과 타성을 주겠지만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항상 돌아올 의향이 있는 원풍경이 쌓인다면 그것도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어바웃 타임> 속 바닷가 장면,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ㅠㅠ

 

매달 우리집에 편지를 부치는 존재 중에 신세계 백화점이 있다. 매번 예쁜 물건이 잔뜩 그려진 종이를 보내주는 덕에 우리 부부는 즐겁게 감상하고 오려서 노트를 꾸미기도 하는 등 재밌게 논다. 어느 날 광고지 한 장을 들었다가 심장이 쿵 했다. 조 말론 ‘우드세이지 앤 씨 솔트’라는 향수가 새로 나왔다는 문구와 함께 <어바웃 타임> 속 그 바다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영국 시골 바닷가의 향이라고. 그래서 사버렸다. ‘바보들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는 데 100ml에 16만 9000원이 문제일까. “그래서 자꾸 뿌리는 거라고.” 내가 설명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나 싶은 표정으로 그녀는 대충 끄덕였지만.

 

Illustlator 김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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