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에서 오르막길 넘고 횡단보도를 건너 한참 더 걸어야 보이는 낡은 빌라. 그 빌라 2층에는 호수가 표시되지 않은 회색 철문 하나가 있다. 내 장기 무사하니…? 저절로 자문하게 되는 비주얼이지만, 사실 이곳은 부동산 앱을 싹싹 뒤져 찾아낸 소중한 전셋집. 서울에 올라온 지 7년 만에 얻은 나의 첫 자취방이다. 스무 살 때부터 기숙사와 사택을 전전하며 살아온 탓에 나의 자취 로망은 원대했다. 전세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부터 인테리어 생각뿐이었으니. 컵 하나부터 매일 덮고 자는 이불까지 마음에 쏙 드는 걸로 채워 넣으리, 다짐했다. 지르고 싶은 소품들을 잔뜩 캡처한 후, 머릿속에서 배치했다가 들어내기를 반복했다. 내 취향과 방식으로 가득 찬 나의 우주. 진정한 독립이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불길한 역접 접속사의 등장으로 눈치챘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이삿날 오후, 딸의 자취집을 시찰하기 위해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두 분은 신발을 벗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엄마는 큰방 한쪽 벽에 행거 폴부터 세웠고, 아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상을 조립했다. 아니, 아직 거기 뭐가 들어갈지 모르는데…. 우물쭈물하는 동안 내 의견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가구 배치가 완성됐다. 고향 집에서처럼 책상과 책장이 맞물려 ‘기역’ 자로 놓였고, 전신 거울을 놓으려던 자리는 커다란 서랍장이 차지했다. 초등학생 때 썼던 좌식 테이블까지 등장해 정신이 더욱 혼미해졌다. 용기를 내어 창문 쪽으로 침대를 붙이자고 주장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묵살당했다. “화장실 쪽으로 머리를 두면 안 좋다!”
생활용품을 사러 가는 길, 집에서의 패배를 복기하며 이번만은 적극적으로 대응하리라 다짐했다. 배치야 바꾸면 그만이지만 물건은 계속 남아 날 슬프게 할 테니까. 기록할 만한 위기는 두 번이었다. 엄마가 커다란 꽃이 그려진 분홍색 극세사 이불을 카트에 담은 것이다. 세트로 노란색 베개도 함께(물론 꽃무늬). 이 친구들이 내 침대에 덮여있는 상상을 하자 심장이 아찔하게 진자 운동을 하였다. 반쯤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어머니, 분홍색 이불은 졸업하고 싶습니다. 10년 넘게 덮은 핑크색 토끼 이불 잊으셨나요? 악어의 눈물 덕에 회색 침구를 살 수 있었다. 우윳빛 커튼에 대한 로망은 아빠의 불호령으로 좌절됐다. “네가 흰색 천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팩트 폭력에 머리가 멍해진 사이, 엄마가 황동색 블라인드를 날치기로 계산하려 했다. 이외에도 그릇, 수저 세트, 쓰레기통, 욕실 슬리퍼, 발 매트 등등 모든 품목에서 취향 주권을 지키기 위한 사투는 계속됐다.
집에 돌아와 무채색 전리품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신고식을 치른 느낌이었다. 오롯이 내 취향과 방식으로 나만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관문.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노’를 외치는 것. 까다롭게 구는 딸에게 조금 서운했을진 몰라도, 부모님도 조금은 깨닫지 않았을까? 품 안의 자식이 어느새 자기 세계를 꿈꾸는 어른이 됐다는걸. 아무리 못 미덥고 마음에 안 들어도 ‘취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음 날, 퇴근을 하고 돌아와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변기에 눈부신 레몬색 커버가 씌어져 있었다. 화장실이 너무 춥다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두 분이 머리를 맞대고 변기 커버를 뒤적이는 모습이 상상돼서일까. 그 샛노란 커버만큼은 왠지 미워 보이지가 않았다.
[806호 – 독립일기]
Editor 김슬
Illustrator 남미가
진짜 호주를 만날 시간
연세우유크림빵과 드라마 덕후라면서요...?
티젠 콤부차 부스에 가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매일이 축제라고 생각하며 살아보자.
대학 축제라는 것이 행복한 대학 생활의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메인 스폰서로 등장한 본디(Bond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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