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서, ‘통금 문제로 부모님과 싸우다가 너무 화나서 거울을 깨버렸다’는 사연을 읽었어. 매년 3월만 되면 비슷한 이야기가 꼭 올라오더라. 클리셰로 범벅 된 뻔한 드라마처럼 매번 등장하는 사람도 비슷해. 무리한 통금시간을 강요하는 부모님과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픈 자식들.

 

나도 그 재미없는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하나였어. 통금시간 10시, 하늘이 무너져도 외박 불가. 각종 행사 및 시험 기간 예외 없음. 참고로 우리 집은 인천 끄트머리에 있었고, 학교는 남산 아래였어. 다들 알잖아. 매일 왕복 4시간 거리를 이동하면서 10시 통금을 지키는 건, 수업 끝나고 어떤 딴짓도 하지 않고 바로 귀가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거.

 

솔직히 너무 했지. 스무 살.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 새내기가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어. 술도 실컷 마시고 싶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싶고, 좋아하는 오빠랑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도 하고 싶었다고. 왜 그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나는 사춘기 때도 안 하던 반항을 시작했어. 그래, 통금을 어겨보자!

 

 

저녁 8시가 넘어가면 어디냐고 문자가 와. 답장을 안 하면 전화가 오지. 부재중 전화 20통, 30통… 진동이 울릴 때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사람처럼 심장이 큰소리로 쿵쿵거렸어. 선배들은 차라리 휴대폰을 꺼 두라고 했지만 그럴 배짱까진 안 생기더라. 결국 엄청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 갔어. 도착하니까 열두시가 조금 넘었던 것 같아. 통금 2시간 초과. 화가 잔뜩 난 아빠는 내가 문을 채 열기도 전에 소리부터 지르셨어. “그딴 식으로 행동할 거면 학교고 뭐고 당장 다 때려치워”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어. 내딛는 걸음마다 안 된다, 위험하다, 틀렸다, 제지를 받으니까 진짜 지치더라. 줄에 묶인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어. 귀가 시간이나 옷차림 같은 문제로 부딪치는 건 일상. 휴학 문제로 싸울 때는 말 그대로 피바람이 불었어. 내가 의견을 굽히지 않으니까, 아예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하시더라고. 심지어 수업도 못 가게 했어. 휴대폰이랑 노트북까지 뺏긴 채로 불 꺼진 방에서 웅크려 앉아서 생각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찾은 원인은 이거야. 다들 어렸을 때 이런 말 한 번씩은 들어봤지.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라고. 어린 나는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어. 근데 그 말을 뒤집으면 “엄마 아빠 말을 안 들으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더라. 부모님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계시겠지. 당신들이 어련히 알아서 ‘옳은’ 길을 알려주는데, 따르지 않는 내가 ‘나쁘’다고.

 

아니 아무리 엄마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해도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 있는 거잖아.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 답답하게도 저 명제 안에서는 그 당연한 게 존중이 안 되더라. 하지만 난 인생의 방향 정도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어. 설사 후회를 하더라도 말이야. 나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지 엄마 아빠의 소유물이 아니니까.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어. 일단 차분하게 설득부터 했지. 이제 나도 성인이니까 의견을 존중해 달라고. 전혀 통하지 않았어.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해 봤자 듣질 않으시더라고. 철없는 소리 한다며 야단만 맞았어.

 

‘계속 싸우다 보면 부모님이 언젠가 포기하신다’는 조언을 듣고, 좀 더 과격한 방법을 쓰기도 했어. 어떤 일을 결정할 땐 허락을 구하는 대신 통보하기.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고 확실하게 결론 내리기. (이제까진 혼나는 게 무서워서 분위기가 안 좋다 싶으면 빠르게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거든)

 

 

언젠가는 내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모님이 속상해할걸 뻔히 알면서 심한 말을 한 적도 있어. “후회해도 내 인생”이라고. “언제까지 엄마 아빠가 책임질 수 있을 것 같냐”고.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나. 불같이 화를 내던 아빠는 갑자기 한숨을 푹 쉬면서 “네 맘대로 하라”고 체념했고, 엄마는… 조용히 우셨어.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어. 그래야 행복할 것 같아. 착한 딸이 부모님 가치관에 무조건 복종하는 걸 의미한다면 미련 없이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그게 엄마 아빠를 포기하고 싶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더더욱 아니고. 그냥 나로 살고 싶다는 건데. 그게 왜 부모님 가슴에 못 박는 일이 되는 걸까. 응원해 주시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나쁜 앨까.

 

미안함, 야속함, 갑갑함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와중에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어. 길고 지루한 싸움이 쉽게 끝나진 않겠구나.

 


아마 착한 딸을 그만두는 일은 평생의 숙제로 남을지도 몰라.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송함과, 나를 잃지 않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번번히 갈등하겠지. 지금까지 나는 엄마 아빠를 설득해서 비뚤어진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했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그분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대로더라. 부모님 입장에선 지금 관계를 변화시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나라도 내 편을 들어주기로 했어.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이런 대사가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나를 더 사랑한다고. 내가 딱 그런 것 같아. 부모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나를 더 사랑해.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 부모님이 내 선택에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도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아. 그분들 입장과 내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거 알거든. 그걸 꼭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라도 부모님과 나 사이의 거리를 넓힐 수 있게 돼서 다행이야.

 

다시 처음의 대나무숲 이야기로 돌아가서, 과거의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제보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부모님을 이해하지도 져버리지도 못하는 네게. 어설프게 착한 내가 택한 차선의 방법이 참고가 되길 바랄게. 우린 나름의 최선을 다해, 느리지만 완벽한 독립으로 가는 중이야.

 


illustrator 백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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