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나 방학, 긴 연휴엔 ‘엄빠 투어’를 떠난다. 기차 여석이 허락하면 아빠가 있는 목포부터 들러 공식 외식 메뉴 아귀찜을 먹고, 아빠와 TV를 본 후, 밤에는 대학생인 동생이 들려주는 <치즈인더트랩> 뺨치는 캠퍼스 로맨스를 경청한다.

 

두 밤쯤 자고 나면 슬슬 차표를 알아보기 시작. 목포에서 두 시간 거리의 엄마에게 간다. 부모님이 함께 살면 왕복 한 번이면 되니 편하겠지만, 두 분이 갈라서고 평화를 되찾기까지의 지난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나의 수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집에 가면 아빠는 손님맞이하듯 새 이불을 깔아준다. 동생은 볼멘 소리 하나 없이 침대를 양보하고, 매번 물어보는 이사간 집의 비밀번호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엄마에게 도착하면, 엄마는 마중 나온 차 안에서부터 밤까지 그동안 쌓아놨던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바쁘다. 1년에 많으면 네 번, 적게는 두 번. 몇 밤 자고 휙 떠나버리는 딸은 부모님에게 ‘이벤트’다.

 

 

‘엄빠 투어’를 떠나는 내 마음도 사뭇 비장하다. 화목한 시간을 보내리라 작정하고 기차를 타기 때문에 다툼 없이, 좋은 이야기만 나누다가 돌아오고 싶다. 이는 아빠에게 무난한 이야기만 건네는 이유 겸 핑계이기도 하다.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 같은 성격이기에,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일 없는, 예를 들면 종편에 나오는 특이한 자연인 혹은 정치인 욕이나 하면서 안전한 대화를 유지하는 거다.

 

“어떻게 사냐”는 질문에는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속마음 대신 잘 지내고 있다고, 열심히 하고 있다고 아빠의 얼굴이 환해질 말을 고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혹여 핏대 세우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100%의 ‘좋은 시간’을 보낸 후 기차에 오르면 세상에서 가장 사려 깊은 딸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 착한 딸 흉내를 낼 수 있는 이유는 서울역에 도착하는 순간 내가 완전한 개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곳에선 엄마 아빠의 자식이 아닌 ‘나’로서 내 일에만 몰두할 수 있고, 4시간이라는 물리적 거리 뒤에 숨어 집안의 이슈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가족의 일에 대해 잠깐이나마 머리를 처박고 안 보이는 척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이번 ‘엄빠 투어’에선 아빠의 수술 소식을 들었다. 통풍으로 몇 년간 고생했는데, 더 이상 투석을 미룰 수 없어 며칠 뒤 혈관 확장 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어려웠다. 그저 이것저것 묻고 걱정의 말을 건넸다. 수술 후엔 괜찮느냐고, 문자를 몇 통 하고 전화도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일을 하겠지. 마감도 하고,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던 그때 처럼.

 

전쟁터같은 집안에서 부모가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동생은, 이제 아빠를 병원에 모시고 왔다 갔다 하며 환자의 짜증을 받아내야 한다. 가족의 아픈 조각들로부터 나는 도망칠 수 있지만 동생은 그럴 수 없다. 생활이기 때문이다. 걸러 내거나 블러처리 할 수 없는, 이벤트와는 거리가 먼.

 

 

서울 사는 딸의 방문 이벤트는 기차에서 보내는 문자로 마무리된다. “오랜만에 봐서 너무 좋았어요. 건강 챙기세요.” “저도 올라가서 열심히 할게요. 사랑해요.” 비슷비슷한 말을 쓴 후 하트 이모티콘을 붙여서 보내는 일. 거기에 더해 동생에게 “아빠 잘 부탁해ㅠㅠ” 문자를 보내며 누나 노릇을 하는 것. 이토록 편리하게 죄책감을 덜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손님처럼 멀찍이 서서 좋은 부분만 슥 핥아먹고 가버리는 주제에 누군가의 버거운 어깨를 토닥이는 게 참 기만적으로 느껴져서, 글자를 몇 번이나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동생에게는 아무 말도 써 보내지 못했다.


[817호 – 독립일기]

Illustrator 남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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