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반째 한 남자와 연애 중이다. 연애 기간을 밝히면 친구 대부분은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누군가와 1년 이상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며, 연애 오래 하는 비결을 묻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특별한 비결 같은 건 없었다. 신변의 변화(군대, 유학, 취직)가 많은 이십 대에는 원래 한 사람을 진득하게 만나기가 어렵고, 나 또한 예외 없이 그래왔다. 다만 이번엔 남들보다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연애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평범해져 갔다. 사실 난 그게 싫지 않았다. 가슴 터질 듯 설레진 않아도,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별 탈 없이 편안했으니까.

 

 

[연인]의 사전적 의미는 ‘연애하는 관계의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그 앞에 [오래된]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 많은 의미를 품게 된다. ‘사랑한다’는 서술어를 붙일 수 있는 거의 모든 존잴 하나로 압축해놓은 상태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인다역의 배우처럼 때로는 친구, 때로는 가족, 때로는 고양이의 역할까지 하니, 그 없는 삶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가끔은 애인이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것 같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뭘 원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채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걸, 어떻게 알았어?”라고 외치곤 한다. 언젠가는 이유 없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골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없이 날 끌어안은 애인이 등을 살살 긁어줬다. 꼭 강아지 배 긁어주는 것처럼.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졌다. 혼자 있었으면 하루 종일 쳐져 있었을 텐데, 그걸 5초 만에 해결하다니. 새삼 4년 차 애인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함께한 세월이 길다고 해서 아무나 그처럼 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연애는 제법 해 봤다. 그건 애정을 가지고 나에 대한 자료를 차곡차곡 쌓아온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다. 좋아하는 노래, 음식같이 단편적인 정보부터.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나, 웃나, 상처받나 같은 고차원적인(?) 문제까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해준 노력의 결과물이다. 늘 감사하고 있었다. 얼마 전, 우리의 무탈한 연애에 회의감을 느끼게 한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대에 나란히 누워 빈둥거리던 날의 일이다. 읽고 있던 책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질문이 많아져요”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그렇지. 사랑하면 그 사람이 요즘 어떤 음악을 듣는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하다못해 치약은 뭘 쓰는 지까지 궁금해지지. 문득 애인에게 그런 관심을 받은 게 언제였나 떠올려 봤는데,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다. 1차 분노. 그래서 “너는 이제 나한테 궁금한 게 없냐”고 물었는데, 애인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해맑게 답했다. “당연하지~ 이미 다 아는데! 아마 너보다도 내가 너를 더 잘 알걸?” 2차 분노. 나는 그날 밤 애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잤다.

 

수능 후 버려진 교과서의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궁금한 게 없다니. 배신감이 밀려왔다. 잠이고 뭐고 두들겨 깨워서 일장 연설을 쏟아내고 싶었다. 사람을 다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사람에 담긴 이야기는 시시각각 바뀐다. 책으로 치면 매 순간 개정판이 나오는 셈이다. 고로 초판본만 열심히 읽은 학생은 우등생으로 남을 수 없다.

 

 

우리가 막 만나기 시작할 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다른 영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단순히 선호하는 영화의 순위가 바뀐 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 변했다. 애초에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꽁꽁 감춰놓아 그가 모르는 것들도 많다. 4년 동안 바뀌어가는 내 모습을 애인이 알아채지도 못했고, 하물며 궁금해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다.

 

때문에 우리는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이상형이 뭔지 대해 재차 물어야 하는 거다. 몇 년 전에 물어봐서 이미 알고 있더라도 또 물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중대발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메모 앱을 켜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은 눈에 잘 안 띄는 부분에서 조금씩 변하고, 변화를 방치한 사랑은 그와 비슷한 속도로 망가지다가, 결국 당신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더 먼 곳으로 가버린다.”

 


공개적으로 애인 흉을 길게 봤지만, 사실 위에서 말한 갈등은 허무하게 일단락됐다.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 친구의 사랑싸움은 들어주지도 공감해주지도 맙시다. 하하.)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는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라고 일축하는 바람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너를 다 안다”는 문장에서 사랑의 종말을 떠올렸다. 알 거 다 알기 때문에 더 궁금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애인은 같은 문장을, 오래된 연인의 신뢰, 대체 불가능함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니까 언어의 체계가 달랐던 거다. 4년 넘게 함께 한 사이지만 어쨌거나 개별적인 존재기 때문에, 같은 언어로 된 같은 문장을 봐도 다르게 해석했던 거다. 나쁜 쪽이 누구인지 잘잘못을 가려내는 게 더는 의미 없어졌으므로, “그럼 이제 사이 좋게지내자”하고 말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번 싸움(?)을 통해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사람은 매 순간 변하는 존재이므로, 아무리 오래된 연인이라고 해도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 것. 둘째, 서로를 관찰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 것. 마지막으로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므로 관계에 빈틈이 생기더라도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말 것. 당분간은 이 세 가지를 명심하며 평화롭게 지내볼 계획이다. 이 글을 읽고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더 늦기 전에 애인에게 질문들 하시길.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제일 좋았던 게 뭐였어? 예전에 말했던 거 보다 좋았어?”

 


illustrator 백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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