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야 말았다. 해가 바뀌는 걸 핑계 삼아 이것저것 사들이기 좋은 12월이. 그중에서도 극성수기를 맞고 있는 물품은 ‘다이어리’. 안 사면 아쉽고 구매한 후엔 놀랍게도 곧 존재를 까먹게 된다. 다이어리는, 고작 한 살 더 먹었을 뿐인데 자신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은 속성을 자극하는 물건이다.
서점의 문구 코너에 가보면, 색색의 예쁜 표지와 다양한 구성을 갖춘 다이어리들이 인간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봐요, 이 정갈한 네모 칸 좀 봐요. 이 칸을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알찬 하루를 상상해보라고요.” “난 만년필도 번지지 않는 궁극의 질을 갖췄어요. 당신의 인사이트를 마음껏 끄적여봐요!” 그럼 그 앞에 선 바보 같은 인간은 오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며 ‘흐흐’ 웃다가 집어 들고 마는 것이다.
작년 요맘때 똑같은 표정으로 사서, 지금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심적으론 이미)구 다이어리’는 까맣게 잊은 채로. 그리고 요즘 나를 ‘흐흐’ 웃게 만드는 물건. 가죽 공방에서 커버를 한 땀 한 땀 만들고 속지를 줄로 끼워 쓰는 다이어리인데, 값은 좀 비싸지만 매년 종이만 교체하면 영원히도 쓸 수 있다. 가죽은 손때가 묻을수록 멋을 더한다니 그 점도 기대가 되고.
무엇보다 너무 예뻐서 컴퓨터 화면 너머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원래 다이어리는 보려고 사는 게 아닌가! 흠흠. 그래도 인간이라면 눈곱만큼의 발전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덥석 새것을 사기 전 올해의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기로 한다. 내 경우엔 하루를 기록하는 칸이 너무 큰 게 부담으로 작용한 것 같다.
한 장에 일주일이 다 들어있는 구성은 몇 줄 쓰지도 못 할 것 같아서 굳이 데일리 칸이 큰 걸 고르고 골라 샀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소설 한 편을 써도 될 만큼 광활하게 느껴졌다. 아니, 난 오늘도 똑같이 회사 가고 끝나고 밥 먹고 가끔 남자친구 만나고. 길게 쓸 만한 일이 없는 걸. 내가 호메로스라면 또 모를까….
그렇다면 다이어리를 산 초반에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썼단 말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옛 다이어리들을 몇 개 펼쳐보았다. 스물두 살 때 쓴 ‘감사일기’가 눈에 띄었다. 불평불만이 많은 성정을 바꿔보고자 하루의 감사한 일에 대해 짧게 기록하는 일기였는데, 모든 일에서 빛보단 어둠을 더 잘 보는 인간이므로 소재를 찾기 어려웠다.
한 줄이라도 쓰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나 머리 감은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의 평범한 사건들 사이에서 기쁨을 세심하게 캐내야 했다. 그렇게 샅샅이 찾아낸 감사한 일들이 종이에 쓰였다. “오늘 저녁 훈제 오리 맛있었다. 감사.” “사장님이 연말이라고 보너스 5만원 주셨다. 감동적이다. 감사.” 나름 분발해서 네 달 정도 꾸준히 쓰다가 이래저래 바빠지면서 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때 쓴 일기를 보니 올해의 난 뭘 그리 거창한 걸 쓰려고 했나 싶다. 대서사시는 아니어도 하루를 풍요롭게 만든 시덥잖은 것들을 적어둘 수는 있었을 텐데. 문제점을 알았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구매해도 되겠다…!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데 한 살 더 먹으면 좀 끈기 있는 인간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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