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이 새끼야! 제발 좀 가라고!” 그녀가 소리쳤다.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 그리고 나는 건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한 삼각형을 그린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친구와 나만 서 있었고 그녀는 반쯤 쓰러진 채였다.

 

괴성을 지르며 “빨리 꺼지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자니 그녀의 친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되겠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먼저 들어가세요.” 약 한 시간 반 전,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당신 여자친구 ○○이 친구인데, 급히 건대입구로 와달라는 전화였다.

 

○○이가 건대에서 선배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 꽐라가 됐으니 데리러 좀 와 달라고. 또야? 나는 한숨을 쉬며 건대입구로 향했다. 선배라는 놈은 키가 크고 멀끔히 생긴 사람이었다. 다만 과 여자 후배에게 술을 진탕 먹여 수작 부리기로 유명했다. 곧 입대를 앞두고 그녀와 술 약속을 했단다. 그런 놈과 약속이 있다고 내게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한 시간 반을 걸려 도착한 곳엔 만취 상태로 쓰러져 “니가 여기 왜 오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녀와 친구뿐, 선배 놈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학기 초가 되면 CC가 넘쳐난다. 재수하며 사귄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대학생이 되니 모든 게 새로웠다. 팔짱 끼고 벚꽃 흐드러진 교내를 걷는 커플이 그저 부러웠다.

 

단순히 함께 수업 듣는 동기 사이에서도 정이 싹텄다. 그녀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술을 좋아하면서 술버릇이 나빴다(최악).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성 편력도 심했다. 술 한 잔도 못 하는 나와는 상극이었으나, 서로 다른 매력 때문에 끌렸다. 우리는 각자 전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서로 그러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영등포구청역 근처 벤치에 앉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전 여자친구는 갑작스런 이별에 눈물을 쏟았다. 죄책감은 다음 날 시작한 새 연애의 설렘에 조용히 묻혔다. 그녀의 제안으로 우리는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조차 속이고 비밀 CC가 됐다. 건대입구 사건 이후에도 언제나처럼 나는 그녀로부터 어떤 해명도 듣지 못했다.

 

 

슬쩍 “이제 공개 연애를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그러면 여럿 곤란해질 거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 대답의 진짜 의미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밝혀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 여행을 간다던 그녀는 알바하던 가게에서 만난 오빠와 여행을 갔다.

 

24일 밤, 한가하던 나와 함께 술을 먹던 과 친구가 내 앞에서 “○○이, 요즘 만난다던 그 오빠랑 어디 놀러 갔다던데?”라며 건조하게 내뱉은 말이 화근이었다. 가족 여행이 아니라 가족 놀이를 하러 간 그녀와,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은 나는 결국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처럼 주먹 대신 욕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끝냈다.

 

춘풍에 마음이 동할 수 있다. 마음이 동하니 익숙함보다 설렘이 그리울 수도 있다. 다만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에 꼭 두 가지를 생각해라. 1. 오랜 신뢰를 저버릴 만큼 지금의 설렘이 중요한가. 2. 그래서 그(녀)가 나와 정말 잘 맞는 사람인가. 그리고 비밀 연애는 때려죽여도 하지 마.

 

조웅재 / 럽스타그램 @woongja_c


[841호 – special] 

Intern 최은유

Illustrator 남미가

 

1.술 때문에 망함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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