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여성 상위 시대라기에, 세상이 좋아지니까 여성들이 편해서 우는 소리 한다기에, 정말 그런가 하고 옛날과 비교해봤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1 지금은 여성 상위 시대?

 

➊ 여성 선전 시대가 오면(2) 「조선일보」 1930년 1월 12일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➋ 현대풍경(現代風景) (2) 「조선일보」 1930년 3월 9일

➌ 사나희와 녀편네 「조선일보」 1928년 9월 21일

 

2017 – 결혼 비용만 유일하게 ‘남성 상위 시대’

신혼부부가 결혼할 때 쓰는 돈이 평균 2억 6,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중략) 이 가운데 신랑이 1억 7,116만원, 신부는 9,216만원을 부담해 신랑 분담률이 신부의 2배 정도됩니다. (중략)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경제적 능력도 높아지면서 ‘여성 상위 시대’니 ‘신(新)모계 사회’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데 결혼 비용은 여전히‘ 남성 상위’인 모양입니다. 「서울경제신문」 2017년 2월 16일

 

<여성 선전 시대가 오면> 1930년 1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문만화(만평)’의 제목이다. 요즘 말로 치면, ‘여성 상위 시대가 오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녀성(여성) 푸로파간다(프로파간다)-시대가 오면’ 다른 곳보다도 그 다리를 광고판 대신 쓸 것 갓다(같다)”는 설명과 함께 ‘돈만 만흐면(많으면) 누구나 조하요’, ‘나는 집세를 못내엿습니다. 구원해주어요’ 등의 문구가 적힌 여성들의 다리가 그려져 있다.

1930년대 사회가 여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 선전 시대’에 대한 불만 토로는 다른 만평에서도 이어진다. ‘사나희(사나이)’가 노동 착취를 당하는 동안, ‘안해(아내)’는 드러누워 담배 피우고 책이나 읽으며 ‘긔생충(기생충)’처럼 산다고 묘사하는가 하면, ‘녀자(여자)’는 남자를 ‘화수분’으로 알고 ‘사나희’의 주머니에서 금이고 은이고 나올 줄 안다며 비아냥댄다.

능력을 실현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것 외에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던 당대 여성들의 상황은 어디서도 고려되지 않았다. 요즘은 어떨까? 남녀 임금 격차, 사회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 등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여전히 결혼식, 데이트 비용을 남성이 더 많이 분담한다며 ‘여성 상위 시대’라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 상위시대’라는 외침이 공허하게만 들리는 이유다.


 

#2 한국 여자들은 ‘된장녀’다?

 

➊화성에 출가 이땅에 사나희는 실혀요. 「조선일보」 1928년 11월 4일

➋어듸서 그 돈이 생길가 「조선일보」 1930년 4월 8일

➌꼬리 피는 공작 「조선일보」 1928년 2월 9일

➍이꼴저꼴(1) 「조선일보」 1933년 2월 16일

 

2016 – ‘김치녀’ ‘성괴’… ‘여성 비하’남성 절반 공감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1일∼20일에 15세 이상 35세 미만 남성 1200명과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성괴’(성형괴물) 등 여성 비하 표현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묻는 설문에 남성 54.2%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쿠키뉴스」 2016년 3월 13일

 

100년 전 모던걸들은 물질만 밝히는 허영심 넘치는 존재로 그려졌다. 1928년 11월 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화성에 출가 이땅에 사나희는 실혀요>라는 제목의 만평은 적나라하게 여성을 깎아내린다. 그림 속 여성들은 다이아몬드를 사주지 않으면, 서로 목마를 태워서라도 이 땅을 벗어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이들은 “이땅의 사나희가 따이아몬드(다이아몬드)를 안사준다면 나는 「아라비아」 사나희나 「아푸리카」(아프리카) 늬그로(흑인)에게라도 쉬집(시집)을 가겟슴니다”라고 외친다. 또 다른 만평 <꼬리 피는 공작>은 양장한 신여성의 모습을 ‘허무러진(허물어진) 초가집에서 나아오는 양장한 여자!’로 표현한다.

“사람의 인격이 그 외화에 잇는가?”라고 일침을 가하는가 하면, “동물원 창쌀(창살)의 공작”에 빗대어 비하하기도 한다. 모던걸에 대한 혐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자주 ‘몸을 파는 존재’로도 묘사된다. 1930년4월 8일 자 「조선일보」에는 <어듸서(어디서) 그 돈이 생길가>라는, 제목부터 심상찮은 만평이 실렸다. 그림 속 두 여성은 무너져 가는 초가집을 배경으로 좋은 옷을 입은 채 웃고 있다.

아래 적힌 문구엔 “먹기에도 어려운 우리들의 소위 누이들은 어듸서 그만한 돈을 엇느냐 말이다.”라는 자문과 “더 말하지 안하도 알만한 일”이라는 자답이 담겨 있다. 거지에 둘러싸인 모던걸에게 “정조를 파러(팔아) 치장을 한 그대나 거지 그대나 외양은 다르나 신세는 별로 다르지 안(않)”다고 분노 섞인 표현을 내뱉은 만평 역시 버젓이 신문에 올라 있다.

이러한 인식은 2018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치녀’, ,‘된장녀’ 같은 표현이 난무하고, 이런 표현에 남성의 절반이 공감한다는 한 설문 조사의 결과는 100년 전과 다름없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보여준다.

 



#3 여전히 두꺼운 유리천장

 

최영숙 스톡홀름대 졸업사진, 『경성기담』 제공

 

2018 – “男 100만원, 女 64만원?”…‘미투 없는 사회’ 출발은 고용 평등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점수로만 뽑으면 합격자 중 70~80%가 여성일 것”이라며 “어느 정도 성비를 맞춰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선 고민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부 기업은 보이지 않는 꼼수를 씁니다. 정량적 평가가 어려운 면접을 통해 남성 합격자를 늘린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죠. 「중앙일보」, 2018년 4월 9일

 

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가 되고도 취업을 못 하고 죽은 여성이 있다면 믿겠나? 최영숙은 1931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스톡홀름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취직난과 생활난이 극심했던 1930년대 조선에서 여성의 취업은 더욱 어려웠다. 그런데도 “미디어는 실직자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현실을 들어 긍정적인 여성상이라 미화하던 일하는 여성들을 남성의 영역을 침범한 공공의 적으로 몰아갔다.”(『불량 소녀들』 p.203)

이런 상황이었으니 외국어 강사, 경성 공립학교 교사, 신문 기자 등 이력서를 넣는 곳마다 거절당하던 최영숙은 결국 작은 점포를 열고 배추와 콩나물을 팔기에 이른다. 1932년 4월 생활고와 낙태 합병증으로 사망한 그에게 세상이 궁금해 한 건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경성기담』 p.316)였다.

2018년, 유리천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남녀 임금 격차·여성의 임원 진급 배제 등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실력이 아닌 ‘남녀성비’를 기준으로 인재를 채용해야 한다는 회사들의 주장에 아득해질 따름이다.


 

#4 대중가요 속 여성 혐오

 

 

2018 – 꽃

작사 나플라 작곡 그레이 노래 나플라 

강남 코 조합 잘됐네 B급에서 올라간 네 급은 한 top 10 안에 들어가니 (중략) 너의 꽃 같은 얼굴에 살짝 묻은 된장이 향긋하게 돌아와 (중략) 나이가 들수록더 구수해지는 냄새 넌 어때? 자긴 어리데

 

1930년대 대중가요 ‘뚱딴지 서울’의 가사는 여성을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존재로 바라봤던 당시의 편견을 보여준다. 2018년의 힙합신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듯 보인다. ‘꽃’의 가사를 보면, 여성은 그저 꼴불견 정도가 아니라 ‘성괴’에 ‘된장녀’로 비치니 말이다.
더 슬픈 건 이런 수위의 여성비하적 발언에는 이미 무감각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잖아? 이게 왜 문제야?”라고 말하는 이들이 또 이런 노래를 소비하니, 시대를 가로지르는 그 연결고리 참 대단하다.

 


 

#5 ME TOO를 외친 피해자 탓 하기

 


왼쪽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희도, 『경성기담』 제공 
오른쪽 – 이아부의 유모어 소설 「키스내기 화투」, 잡지 『별건곤』 1934년 4월호 수록, 『경성기담』 제공

                     

2018 – ‘안희정 폭로’ 이후…일부 언론 피해자에 ‘2차 가해’                     

안 전 지사의 성폭력 ‘미투’ 증언 이후 13일까지 보도를 보면, 언론들은 ‘피해자 부각’에 집중하는 행태를 보였다. 특히 사건의 본질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신상이 그대로 시민에게 전달된 경우가 있었다. 「한겨례」 2018년 3월 13일

                     

1934년 3월 17일 「조선중앙일보」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중앙보육학교(현 중앙대학교) 교장 박희도의 성폭행 사건을 특종 보도한다. 박희도가 미모의 유부녀 학생 윤신실에게 추악한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투서했다는 ‘정조 유린 고발서’를 보자.

“어떤 날 몇몇 학생이 놀러 왔는데 박희도의 말이 키스 내기 화투를 하자하여 화투를 하다 간 후 나는 그 집에 살기 때문에 혼자 남아 있는데 나를 끌어 키스하고 자기의 침대에 눕히고…….”(『경성기담』 p.149) 이른바 ‘키스 내기 화투’ 사건은 소설 소재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졌고, 학교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박희도 측은 피해자를 ‘음탕한 계집’으로 몰아간다. 익숙한 프레임보다 더 끔찍한 건 다음이다. 기자회견장에 끌려나온 피해자가 사실은 다른 인물과 불륜을 저지른 적 있는 여성이고, 분노한 남편이 제 3의 인물인 박희도를 고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자 언론은 박희도가 ‘무고’한 게 아니었음에도, 피해자가 현재 머무는 집까지 추궁하며 집요하게 신상을 턴다. 가해자에 대한 비판과 처벌보다 피해자의 개인 신상 털기에 주목하고, 명백한 범죄 내용을 ‘가십’으로 소비하는 패턴. 어디서 많이 봤다 싶지 않나? 이후 피해자의 삶은 밝혀진 바 없지만, 가해자 박희도는 교장직을 사퇴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하는 변절자가 되었다.

                     

                     

위 – 김동인이 김명순을 모델로 쓴 소설 ‘김연실전’, 『경성기담』 제공 
아래 – 김명순 자살시도 기사, 「매일신보」 1915년 7월 30일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2018 – “이제 여직원들과 일 못하겠네” 미투에 삐딱한 한국사회 민낯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의혹이 폭로되자 같은 당 윤주원 부산시의원 예비후보는 트위터에 “달라는 ×이나 주는 ×이나 똑같다”는 글을 올렸다가 당에서 제명 처리됐다. 민주당 전북도당의 한 당직자도 6일 페이스북에 “알 듯 모를 듯 성상납 한 것 아니냐”고 글을 올린 사실이 알려져 사직서를 냈다. 「한겨레」 2018년 3월 9일

 

1939년, 동인지 「문장」 3월호에 ‘김연실전’이 실렸다. 소설의 주인공 김연실의 실제 모델은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이다. 김명순은 5개 국어를 구사했던 수재이자, 자유로운 연애와 여성해방을 꿈꾼 ‘1세대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생활 중 일본군 소위 이응준에게 데이트 강간 피해를 입고 만다.

사건 이후 김명순은 피해자였음에도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를 했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애써 꿋꿋하게 삶을 이어 갔지만, 동인지 「창조」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동인이 자신을 모티프로 문란한 신여성을 풍자하는 〈김연실전〉을 연재하자 상처를 입고 일본으로 떠난다.

이후 김명순은 지긋지긋한 ‘피해자 탓’에 지쳐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외롭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김명순들’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MeToo 고백을 한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2차 가해는 그 옛날 김명순이 당했던 그것과 무섭도록 겹쳐 보인다.


 

#6 남녀평등은 역차별?

 

➊ 이래도 남녀평등인가?, 「매일신보」 1934년 5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➋ 봄(2) 여자는 살찌는 봄, 「조선일보」 1928년 4월 27일, 『불량소녀들』 제공

 

2018 – ‘90년생 김지훈’은 어떻게 1000만원 넘는 후원을 받았나

‘남성 역차별 시대 남성 인권을 위한 책’을 표방한 책 ‘90년생 김지훈’은 등장부터 화제였다.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하는 듯한 제목과 내용을 담아 이목을 끌었고, 여러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펀딩을 거부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입소문을 탔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는 시작 1주일 만에 목표액 300만원을 훌쩍 넘은 1000만원을 달성했다. 「한겨레」 2018년 4월 15일

 

징검다리를 건너는 남성이 위태로워 보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등 뒤에 여성을 업고 있다. 1934년 5월 28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 만평의 제목은 <이래도 남녀평등인가?>이다. 만평은 “말끗마다(말끝마다) 핏대를 올니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징검다리를 건늘적에도(건널 적에도) 이러케 남편에게 안켜” 간다고 여성들을 비난한다.

어떤 만평은 “그림의 남자는 해골만 남엇고 여자는 왜 이다지 살졌는지?”라고 비꼬며 여자들이 “사나희의 인형 노릇은 이제는 실타고 여자해방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남자들 노예시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에 당시 문인이었던 김억(김안서)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 질서를 흔들려는 여성해방운동의 대항마로서 ‘남성해방연맹’을 장난처럼 제안하기도 했다.(『불량 소녀들』 p.192) 만평과 달리, 그림 밖 여성들이 ‘남존여비’가 당연시되던 세상에서 차별받던 시대에도 남성들은 늘 억울해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할 ‘90년생 김지훈’을 만들자는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가 열렸고, 일주일 만에 1000만원이 모금됐다. ‘90년생 김지훈’의 가상 목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왜 황금 연휴 전날에 동시에 생리해요?”라고.

 


 

#7 여성의 행복은 결혼?

 

➊ 잡지 『여성』 1937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 ‘남녀 대항 좌담회’의 삽화,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제공

➋ 반양녀의 탄식! 허스감이 업서요,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21일,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2018 – ‘결혼’에 등돌리는 여성들, 이유는 ‘행복’

여성들의 가정생활 만족도가 남성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여성이 남성보다 적었다.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혼인율의 원인으로 청년 실업과 높은 집값 부담이 꼽히지만 여성이 가정과 직장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저출산 해법이 나올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향비즈」 2018년 3월 22일

 

결혼이 대체 뭐라고,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조금만 다른 길을 가면 들들 볶인다. “여성은 남편에 대한 직접적인 봉사는 물론이고, 가사와 육아를 통한 희생과 종속까지 강요당했다.”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p.197) 심지어 근대의 신여성이 택할 수 있는 건, 제대로 된 결혼조차 아니었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21일자의 만평 ‘허스감이 업서요’를 보자. 모던걸들은 자유 연애 결혼을 꿈꿨지만, 연애 상대를 자처한(!) 대부분의 지식인 남성에게는 이미 집안에서 정해준 부인이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자유연애자로서 신여성이 기혼 남성과 연애를 하다가 그의 제2부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중략) 사랑하는 이와 함께 죽음을 택하거나 자살하는 길뿐이었다.”(『불량 소녀들』, p.150)

요즘이라고 결혼이 여성의 행복을 위한 선택일까? 웹툰 『며느라기』, 영화 <B급 며느리>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여전히 결혼에서 희생을 강요받고, 반발하면 ‘이기적인 문제아’ 취급을 당한다. 그러니 현대 여성에게서 비혼을 빼앗지 말라. ‘비혼 선언’만이 모던걸의 상황보다 나아졌단 유일한 희망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한 건 2016년 17명의 대학생이 모여 만든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가 한 발 빨랐다. ‘못된걸’로 통하던 20세기 조선의 모던걸과 21세기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

당시 입소문을 타고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이 공연이 2018년 다시 무대에 오른다. 초연과 마찬가지로 텀블벅에서 예산을 모았고, 무려 500명 이상의 관객이 1500만원을 후원했다. 왜 관객들은 <모던걸 백년사>에 응원을 보냈을까? 개막을 앞두고 만난 극단 하이카라 창작진에게 물었다.

 

interviewee 연출 겸 극작가 서승연(이화여대 12), 공동 연출 이태형(국민대 10), 음악감독 겸 작곡 이진형(성신여대 10), 작곡 김민정(성신여대 13), 작곡 김혜린(이화여대 15)


 

# 창작진 하이-카라 인터뷰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시즌 1 공연 사진

 

1920년대의 ‘모던걸’과 2010년대의 ‘김치녀’ 이야기를 한 편의 뮤지컬로 엮어냈어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나요?

승연 정이현 작가의 단편소설 『이십세기 모단 걸_신김연실전』을 읽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자연스럽게 옛날 신문이나 자료들도 많이 찾아보게 됐는데요. 100년 전 지식인들이 신여성을 칭찬하면서 뒤로는 ‘외모 평가’를 하거나, 사랑한다며 강간을 시도하더라고요.

학교와 생활 속에서 익숙하게 목격한 ‘여성’, 그리고 ‘여성 예술가’를 대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았죠. 그럼 아예 과거의 모던걸과 현재의 김치녀를 함께 보여주면 어떨까? 고민하다 뮤지컬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보다 재미있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혀를 찼던 순간이 또 있어요?

승연 외국 여자와 조선 여자를 비교했던 신문 칼럼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미국 여학생들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수수하다. 하지만 조선 여학생들은 졸업장으로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공부하고, 허영심에 젖어서 화장과 옷에만 신경 쓴다”라는 내용이더라고요. 한국 여성은 ‘김치녀’, ‘된장녀’, 외국 여성은 소위 ‘스시녀’, ‘엘프녀’라고 구분 짓고 비교하는 세태와 너무 똑같아서 놀랐죠.

민정 전 며칠 전, 일본 스모 경기 보도가 제일 황당했어요! 선수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는데, 신성한 스모 판에 여성이 올라와서는 안 된다며, 장내 방송으로 여성 의사들의 심폐소생술을 막는 거예요. 1900년대도 아니고,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2010년대의 주인공 ‘이화영’의 캐릭터에도 그런 현실이 담겨 있어요.

승연 시즌 1의 대학생 이화영은 연극 동아리에서 ‘여배우는 연기의 꽃이지’ 따위의 성차별을 겪으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캐릭터였어요. 반면 시즌 2의 직장인 이화영은 본인을 페미니스트로서 자각하고 있어요. 막 취업한 회사에서 성희롱에 시달리며 부당한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이죠.

사실 대본을 쓰면서, 오히려 ‘여성혐오’의 수위를 현실보다 낮추려고 노력했거든요. 주변에서 수집한 실제 사례들을 담았더니, 많은 분들이 “이건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하더라고요. “SNS에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걸 밝힌다고 왜 직장에서 잘리겠어?” “막무가내로 기쁨조 취급하는 성희롱이 직장 내에서 일어나겠어?” 그런데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정말 대본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나더라고요….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시즌 1 공연 사진        

        

1920년대의 주인공 ‘나경희’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아요. 당대 모던걸들이 겪었을 고초가 느껴지더라고요.

승연 경희라는 이름 자체가 나혜석 작가의 소설에서 빌려온 거예요. 결혼을 해도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의 그림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달라”는 요구를 했던 사람이잖아요. 경희의 대사에 나혜석이 기고한 글을 차용하기도 했어요. 유학을 갔다 와서 이혼했을 때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장면은 김일엽 작가에게서, 구여성은 부인으로 두고 연애는 따로 하는 남성 대신 신여성만 손가락질 받는 장면은 윤심덕에게서 가져왔어요.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부담도 고민도 많았을 것 같아요.

승연 시즌 2를 만들면서는 프로로서 더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는데, 시즌 1 때는 오히려 현실적인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당시엔 오프라인 홍보를 전혀 못했거든요. 다들 대학생이라 혹시나 신상을 털릴까봐. 아무래도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선이 많으니까요. “포스터 붙이다가 누가 사진 찍어 가면 어떡하지?”를 제일 많이 걱정한 거 같아요. 자칫 학교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현실이 너무 답답하네요. 작품 속 대사나 가사로 사이다 같은 한마디 해주실 수 있나요?

승연 “오늘날의 여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헨릭 입센 <인형의 집>의 대사인데요. 창작 된 지 오래되었지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대사가 <모던걸 백년사> 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민정 경희가 번역한 <인형의 집>을 가지고 떠나가면서 “높은 장벽을 헐고, 깊은 규문을 열고, 나 다시 나아갈래. 넘실거리는 불안 날 삼킨다 해도”라고 노래를 부르는데요. 들을 때마다 매번 벅차올라서 울컥하게 돼요.

진형 저는 비슷한 이유로 마지막 곡의 ‘다시 나아가고, 언젠가 세상은 변하고 웃을 수 있다’ 는 가사를 가장 좋아해요. 저희 작품처럼 희망적이거든요.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시즌 1 공연 사진

        

하이카라 창작진의 99%가 여성인데요. 아무래도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겠네요.

승연 많은 관객들이 공연을 재밌게 보시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연출이나 작가가 권위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창작진들에게 피드백을 굉장히 많이 요구하면서 괴롭히는 편이고요.(웃음) 그렇게 수정을 거듭하면서 점점 좋아졌죠.

태형 제가 참여했던 다른 공연에는 남성 제작진, 특히 나이 많은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분위기가 딱딱하다 보니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라고 눈치를 보게 되고요. 하지만 하이카라에서는 서로가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는 사실 시즌 1 때 관객으로 이 작품을 봤고, 제작진으로는 이번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제작진 중 1% 남성으로서 함께 만들어가는 지금, 깨닫는 것이 많아요. ‘나는 의도치 않았고 무의식중에 나왔지만 누군가에겐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는 행동이 있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습관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말들도 조심하게 돼요. 고향에 있는 여동생과 통화할 때, ‘아버지 말씀 잘 듣고’ 하는 대신, 더 진솔한 이야기를 하게 됐죠.(웃음)

 

지난 2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끝으로 <모던걸 백년사>가 다사다난한 사회에 어떤 작품이 되었으면 하나요?

태형 경희의 마지막 대사를 살짝 바꿔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공연이 우리 사회의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바라며, <모던걸 백년사> 시작합니다.”

승연 시즌 1을 할 때, 저희 모두 시즌 2를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시즌 1을 마무리하고 이틀 뒤에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이후 사회의 반응은 더 충격적이었죠. 2년이나 지났는데, 사회는 그대로인 것 같아요.

여전히 관객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시즌 2를 준비하고 있던 시점에, 이번엔 #METOO 운동이 일어나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창작자로서는 이 뮤지컬이 계속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더는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48호 – special]

학생 에디터 문소정 moonsojeong@naver.com 사진제공 하이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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