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스트리밍 서비스를 뒤적이다 문득 실감한 게 있다. 세상엔 경연 프로그램이 정말 많다. 힙합, 패션, 요리, 심지어 사회생활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경연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왜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이 넘쳐나는가 하면… 그야, 잘 팔리니까.

 

당장 나부터도 경연 프로그램을 많이 봤다. 능동적으로 찾아서 챙겨 본 것과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서 혹은 SNS에 자꾸 떠서 알게 된 것까지 다 합하면 보지 않은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집에 TV가 없는 열악한(?) 환경임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서바이벌 쇼 마니아라 칭해도 될 듯하다.

 

역설적인 점은 그 TV 쇼가 내가 평소에 추구하는 가치관과 거리가 멀다는 거다. 경쟁, 생존, 갈등. 쇼를 구성하는 요소를 대충만 읊어 봐도 전부 질색하는 것들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심지어 잘해도) 나보다 뛰어난 놈이 있으면 낙오되는 상대평가 시스템은 볼 때마다 괴기스럽다. 특히 내가 가장 분개하는 지점은 모 방송국의 트레이드마크인 ‘악마의 편집’인데, 어찌나 자극적으로 MSG를 치는지,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악역이 되기도 하고, 무대 하나로 실력 없다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내가 참가자가 된다고 상상하면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아마 1화를 넘기지 못하고 탈락했겠지. 아니 애초에 출연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휴, 나도 모르게 또 흥분했다. 이렇게 몰입해서 열을 내다가 화면을 끄고 나면 약간 머쓱해 진다. ‘어머 나 좀 봐. 싫다 싫다 하면서 모든 회차를 다 봤잖아.’ 제작진의 의도가 바로 이거겠지. ‘욕하면서 보는 시청자’라는 말은 아마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생겼을 거야.

 

가장 최근에 몰입해서 봤던 쇼는 고등학생 래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친구들이 주인공이었지만 서바이벌 쇼답게 악마의 편집이 빠지지 않았다. 어쩌다 가사 실수라도 하면, 그 장면만 몇 번씩 반복해서 보여주고 그것도 모자라 슬로모션 효과까지 넣더라.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심사위원의 부정적인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네요.” “되게 구려요.” “실망이에요.”

 

응원하던 참가자가 가사 실수를 하고 잔뜩 풀이 죽어 무대에서 내려갈 땐 얼마나 안쓰럽던지. 덩달아 울상이 되어 혼잣말을 했다. ‘제발 악성 편집 좀 그만해. 떨어졌잖아! 왜 탈락한 사람을 두 번 죽여.’ 한편으론, ‘그러게 잘 좀 하지’ 싶기도 했다. 수능 망친 나를 보는 엄마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깝고 속상했다. 중요한 무대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방송이 끝나고 탈락자에 대한 연민이 옅어질 즈음, 유튜브에서 그 친구가 나오는 영상을 우연히 봤다. 팬이 그의 활약상을 모아 편집한 영상이었다. 경연에서 보여준 무대뿐만 아니라 방송 밖 모습(소규모 공연장에서 랩하는 거, 친구들과 거리에서 비공식적으로 한 게릴라 공연 등)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10분 남짓한 영상을 끝까지 감상한 소감은, 역시나 잘 하는 친구였다는 것. 기본기도 탄탄하고 목소리도 매력적이었다.

 

하나 재밌었던 건 영상 중간에 문제의 가사 실수 장면도 있었는데, 방송을 볼 때와는 다르게 그다지 심각한 실수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가 오른 수많은 무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가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지만, 곧이어 다른 무대에서 잘 하는 모습이 나와서 별로 안타깝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운 기회를 날리긴 했는데, 실력 있는 친구니 언젠가 잘 되겠지 뭐’하고 넘길 수 있었다.

 

그동안 인생이 경연 프로그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기지 못하면 낙오되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것이 허무하게 날아가는 냉혹한 세계. 그 속에서 나는 경연 프로그램의 참가자이자 PD로서 익숙한 악마의 편집에 매여 있었다. 사소한 패배에도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하고, 부정적인 부분만 모아서 자꾸 돌려 봤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은 단 한 편의 TV 쇼가 아니라, 내가 오른 모든 무대를 담은 유튜브 영상에 가까운 걸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경연 프로그램처럼 8화만에 끝나지도 않고, 등수를 매길 수도 없다.

 

준비가 부족해서, 실수를 해서, 운이 없어서. 이번 쇼에서는 낙오했지만 그건 10분짜리 영상의 한 구간일 뿐이다. 전체를 다 보고 나면 아주 사소한 부분일 테다. 그 이후 다른 쇼에서 우승을 할지, 음원 1위를 할지, 진로를 바꿔 대박이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용기가 난다.

 

물론 내 인생이 시시한 영상일 수도 있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만고만한 실수만 가득할 수도 . 하지만 오늘의 패배 앞에서 당장 위로가 되는 건, 다음엔 잘 될 거라 믿음뿐이므로. 기왕이면 이런 태도로 사는 게 속도 편하고 좋겠다.

 

#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는 주문

당장은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심각하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앞으로 겪을 수많은 패배 중 하나일 뿐이다


[850호 – small mind]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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