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늘 경상도와 제주도를 가로지르고 있는 나의 귀촌 (상상) 메이트가 어느 날 경주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황리단길’이라고 이름 붙은 예쁜 골목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시큰둥했다. 망원동에도 근사한 가게들이 많은데 굳이 경주까지…?

 

내 미지근한 반응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귀촌 메이트의 경주 영업은 계속됐다. “경주에 왕릉이 많잖아. 무덤이 막 길 한복판에 있다고 생각해봐. 엄청 비현실적인 풍경이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느낌? 제일 좋은 건 뭔지 알아? 고도 제한 때문에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 고개를 위로 안 꺾어도 하늘이 보인다니까!” 그렇게 경주에 가게 되었다.

 

숙소는 그녀가, 교통편은 내가 예약하기로 했다. 출발 2주 전에 왕복 2장씩 예매를 마쳤다. 아니, 마친 줄 알았다. 여행 전날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분명 오는 편과 가는 편 두 번 결제했는데, 어플에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통장을 보니 돈은 빠져나갔다.

 

판단 능력을 상실한 나는 “코X일 놈들아, 내 표 어디다 숨겼어?” 절규했고, 옆에 있던 애인이 조심스럽게 의혹을 제기했다. “너 혹시… 다른 날짜 예매한 거 아냐? 지난주라든지.” 기가 막혀서. 파르르 떨며 내가 바보냐고 쏘아붙였다. 1분 후,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누른 ‘승차권 구입 이력’ 창에서 정확히 지난주 토요일로 예매한 2장의 티켓을 볼 수 있었다.

 

아, 그건 어쩌면 신이 준 시그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기필코 망하고 말리라는. 남는 표 중 제일 빠른 차편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경주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귀촌 메이트는 매우 어이없어했으나 곧 쿨하게 용서해주었다. 기차에 몸을 실으니 그래도 여행 기분이 났다.

 

오늘과 내일, 정확히 말하면 오늘의 늦은 오후부터 내일 오후까지, 에누리 없는 24시간을 어떻게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하며 계획을 세웠다. 그때 귀촌 메이트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너 자전거 탈 줄 알지? 경주는 걸어 다니기엔 크고 차 타기엔 작아서 자전거가 딱이야!” 탈 줄은 안다. 아무 것도 없는 평지에서. 자신 없어 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당황했다.

 

설마 자전거를 못 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귀촌 메이트는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수목원이 있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30분이면 가는 곳이니, 우선 자전거를 렌트해보고 정 못 타겠으면 반납하자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자전거에 올라타면 잠들어있던 운동신경이 살아 나 도로 위를 씽씽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록을 보며 달리는 자전거라. 게다가 여행지에서 타는 첫 자전거! 낭만적이잖아! 그렇게 7년 만에 자전거를 조우하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긴장한 나머지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목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페달과 두 바퀴만 있으면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인 귀촌 메이트는 나를 배려하여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맞췄다.

 

20분쯤 달렸을까. ‘아, 보도블록이 참 울퉁불퉁하네’라고 생각한 순간, 한 아저씨가 내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을 들이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배된 내 뇌는 다리를 바닥에 내려 사뿐히 멈추는 대신 핸들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반동에 자전거가 뒤로 넘어갔고, 거기 타고 있던 나는 차도로 굴러떨어졌다. 뒤로 나자빠진 순간의 기억은 없다.

 

눈을 뜨니 오른쪽 정강이가 심히 욱신거렸다는 것밖에. 바지를 걷어보니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은 물론, 멍 든 자리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의사피셜, ‘피하혈종’이라고 했다.) 앞서 가던 그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파서 일어나질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괜히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며 미안해했고, 나는 그녀의 여행을 망친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절뚝거리며 자전거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황리단길’을 지나쳤지만,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내 손에 들린 살상무기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날씨도 급격히 추워져 야경 스폿으로 점찍어 두었던 동궁과 월지를 포기했다. 물가에 비친 작은 궁과 달의 모습이 참 낭만적이었는데.

 

다음 날엔 석굴암에서 내려가는 버스가 1시간 넘게 오질 않아 바로 기차를 타러 가야 했다. 경주에 갔는데 ‘황리단길’은 끝내 구경도 못 한 것이다. 1박 2일 동안 먹은 음식이 모두 맛없었던 건 덤. 어쩜 이리도 대차게 망해버릴 수가! “그래도 언니, 이번 여행의 수확이 있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불쑥 내뱉은 말에 귀촌 메이트가 그딴 게 어딨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뭔데?” “제 인생에서 없애야 할 게 뭔지 깨달았어요.”

 

자전거라든가, 내 육신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라든가. 인스타그램에서 본 낭만적인 그림이 내 것이 되리라는 착각도. 그리고 깔깔 웃는 귀촌 메이트의 얼굴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되는 일이 지지리 없는 여행이었는데 (원인 제공자는 주로 나였고) 짜증 한 번 내지 않다니. 보살인가? 그녀의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사이 좋게 다닐 수도, 불운을 반찬 삼아 웃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없애야 할 것을 안 것도 모자라 꼭 있어야 하는 것까지 얼떨결에 깨달아버렸으니, 수확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도다. 나는 귀촌 메이트에게 날이 선선해질 때쯤 다시 경주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첫 여행은 망했지만 만회의 기회를 줘야지. 나에게도, 경주에게도. 그땐 또 어떤 어이없는 짓으로 보살님의 몸에서 사리가 나오게 할지 모르지만, 이보다 나쁠 순 없을 것이니 괜찮다. 이게 바로 망해본 자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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