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무튼, 방콕』이라는 얇은 책을 읽었다. 방콕이라는 도시에서 좋은 호텔을 저렴한 가격으로 잡아 뷔페 식사를 하고 수영장에서 놀고 방에서 빈둥거리며 보내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삶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거나 가슴을 치며 지난날의 잘잘못을 통감하거나 앞날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획득하지는 못했으나, ‘아, 이렇게도 할 수 있겠네’ 라는 생각은 했다.

 

그렇지. 『아무튼』 시리즈를 읽다 보면 대개 그런 가벼운 생각이 들 것 같다. ‘이것이다’ ‘이것이어야만 한다’ 가 아니라 ‘이렇게도 할 수 있겠네’.

 

아무튼, 『아무튼』 시리즈가 시작된 지점은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다룬 주제는 서재, 쇼핑, 게스트하우스, 망원동, 피트니스, 잡지, 스웨터, 택시, 스릴러, 방콕, 외국어, 로드무비, 딱따구리.이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갓 만든 따끈한 순두부처럼 몽글거린다.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것들을 좋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점점 마이크로화되어 간다.

 

아무튼, 쓸데없는 상상을 많이 하는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혹시 나한테 이 시리즈 중 한 권을 써달라는 제안이 오면 어떻게 하지?’ 사무실의 괜찮은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일어날 리 없는 상상을 하며 남몰래 즐거워하는 인기 없는 여직원처럼(예전의 나였다), 나는 상상에 빠졌다. 과연 내게 생각만 해도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무언가가 있을까?

 

독서, 독서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별의별 책들을 다 읽는다. 가장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백종원의 장사 이야기』(나는 남들이 장사하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노르웨이의 나무―북유럽 스타일로 장작을 패고 쌓고 말리는 법』(모닥불도 좋아한다. 북유럽이라니 근사하다), 『글렌 굴드』(누구인지 알고 싶다), 『니시자와 류에가 말하는 열린 건축』(니시자와 류에가 누구인지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등으로, 그야말로 맥락도 없고 두서도 없다.

 

하지만 내가 독서나 책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건 나보다 더 진지한 독서광의 몫이야.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책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게다가 “취미는 독서”라고 말하려 할 때마다 언젠가 들은 “독서는 취미일 수 없다. 독서는 생활 그 자체여야 한다”는 무시무시하게 단호한 말이 떠오른다(그런데 대체 누가 한 말일까?).

 

 

상상을 계속하자. 상상한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재즈라면 어떨까? 나는 재즈 음악을 거의 매일 듣는다. 하지만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딱히 없는 걸! 좋은 음악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뿐이고, 나에게는 내 나름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 있는데(이를테면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피츠제럴드 중에서 언제나 엘라다) 그건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아무튼, 누가 『아무튼, 재즈』를 쓴다면 나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열정적이며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커피, 커피는 어떨까? 나는 매일 커피를 사발로 들이켜다가 위에 탈이 났을 만큼 좋아한다. 하지만 원두의 원산지를 가린다거나, 약배전이니 중배전이니 하는 단어로 취향을 설명하거나, 전통 있는 로스터리를 드나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믹스커피와 신선하지 못한 원두가 싫을 뿐이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달리는 건 지긋지긋하다. 보통 축구경기장의 바깥쪽 트랙을 5~7바퀴 정도 돌고 나면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애당초 나는 기록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내가 마라톤에 참가할 가능성은 내년에 남북통일이 될 가능성보다 희박할 것이다.

 

그리고 또… 매일 밤 마시는 맥주를 좋아하지만 그래 봤자 마트에서 파는 세계맥주일 뿐이다. 교토라는 도시를 좋아해서 매년 그곳으로만 여행을 가다시피 하는데, 그럼에도 교토에 관한 책 한 권을 쓰면서 사경을 헤맸다. 도무지 교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도 서핑을 하고 싶었고, 암벽 등반도 하고 싶었고, 프랑스 자수도 하고 싶었고, 정원도 가꾸고 싶었고, 카누도 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 중 대부분은 하다가 때려치워 버렸고, 어떤 것들은 시도조차 못했다. 아무튼, 『아무튼』 시리즈 덕분에 내 취미 생활이 얼마나 밋밋하고, 사실 취미 생활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것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들 각자의 세계가 있다. 어느 누구의 세계도 다른 누구의 것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과 개성이 형성되는 데는 어마어마한 유전자의 조합과 부모의 삶의 태도와 양육 방식, 성장 환경, 무엇보다 운명이 우리에게 선사한 다양한 행운과 불운과 인간관계라는 변수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무수히 많은 각자의 세계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 내가 모르는 어느 나라의 작은 집 창가에 켜있을 촛불 하나를 떠올리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용기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그런 세계를, 평범하고도 남다른 세계를 책으로든, 영화로든, 노래로든, 그림으로든, 이 세상에 드러내준다는 건 아주 값지고 고마운 일이다.

 

아무튼, 『아무튼』 시리즈의 편집자님. 저에게는 이 시리즈의 한 권을 쓸 만한 어떤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통감하며 저는 이 시리즈의 기획에서 완전히 물러나겠습니다. 그저 겸허한 독자의 마음으로, 밤마다 맥주 한 캔과 함께 침대에 누워 이 책을 드는 것만으로도 저의 소임은 다한 것 같습니다. 이상,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이상한 여자로부터.


[863호 – think]

Writer 한수희 kazmikgirl@naver.com

책 『온전히 나답게』,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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