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는 건? 그보다 백배쯤 어렵다. 뭔가를 좋아할 때의 마음은 뽀얗게 김이 오르는 육개장과 비슷하다. 내가 그 뜨겁고 빨간 국을 단정하게 옮겨 닮을 줄 아는 어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사랑하는 이 앞에만 서면 얌전히 놓인 국도 쏟아버리는 쫄보다. 그런 내가 무려 ‘제주 특집호’에 ‘제주’를 주제로 한 글을 싣게 되다니. 큰일이다. 하지만 딱한 사정과는 무관하게 마감은 정해진 날짜에 해야 할 테니, 우선 두서없는 고백이라도 시작해봐야겠다.

 

사실 나는 ‘제주 만능주의’ 인간이다. 핑곗거리가 생기면 이때다 싶어 그 섬으로 뽀르르 달려간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요즘 좀 무기력하네→제주도에 가야겠다, 가을이 오니 괜히 싱숭생숭하군→제주행 티켓을 끊자, 입맛이 없네→제주! 근 몇 년간 못해도 계절에 한 번은 제주로 떠났고, 작년에는 한 달 넘게 조용한 마을에서 혼자 머물기도 했다. 아마 올해가 지나기 전에 두어 번은 더 가게 될 것이다.

 

누가 ‘도대체 제주가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제주는 나와 ‘합’이 잘 맞는 섬이라고. 언제부턴가 장소와 사람 사이에도 합 같은 게 있다고 믿게 됐다. 어떤 곳에서는 신이 돕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일이 술술 풀렸고, 또 다른 장소에선 여기에 전생의 원수가 사나 싶게 크고 작은 불행이 따랐다. 심지어 합이 좋은 장소에서는 예상치 못한 불운을 만나도 한편으론 웃을 일이 생기곤 했다(폭설로 고립됐는데 숙소 사람들과 뜻밖의 우정을 쌓게 된다든가!). 나는 그 운명 같은 우연을 ‘장소 궁합’이라고 부른다.

 

길을 헤매다 예정 없이 닿은 골목에서 너무도 취향인 맥줏집을 발견했던 일, 해변에 앉아 있다가 소녀 같은 할망에게 그 마을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를 추천 받았던 일.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놓치고 절망하고 있을 때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줄 천사를 만났던 일까지. 페이스트리처럼 한 겹 한 겹 견고하게 쌓인 다정한 시간들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구공년 백말띠 여행자 김씨와 제주 아일랜드는 백년해로할 궁합이라고.

 

한동안 술이 조금 오른다 싶으면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장소 궁합을 점쳐보자고 졸랐다. 그리고 착한 내 친구들은 엉터리 사주박사 같은 말에 기꺼이 동조해줬다. “오키나와 자마미섬이랑 나는 찰떡궁합이야. 갈 때마다 청춘영화 한 편씩 찍고 와.”, “난 일본 시골 마을이랑 잘 맞나봐. 거기서 귀여운 할머니들을 잔뜩 만났어.” 다들 신나서 자기만의 장소를 자랑하는 사이,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긴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ㅎ이었다. 자긴 유럽과는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별로였다고. 밤새 재즈 지식을 자랑하던 독일 남자나 ㅎ을 고용된 스냅사진작가처럼 대하던 일행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인연 하나까지 묘하게 적대적인 느낌이었다고.

 

 

그날 평소답지 않게 시무룩했던 ㅎ이 혼잣말하듯 덧붙인 이야기는 꽤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내가 문제였는지도 몰라. ‘여기 들인 시간이랑 돈이 얼만데!’ 싶어서 나도 모르게 쩨쩨하게 굴었거든. 원래 여행에선 손해도 보고 낭비도 해야 멋인데.”

 

그날 밤 나는 반농담조로 건넸던 주제, 장소 궁합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나도 외국에 갔을 때 ㅎ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무리해서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뭘 해도 본전 생각이 났다. 조금만 일정이 틀어져도 속상했고, 동행 일정 맞춰주느라 쓴 시간이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구글맵을 켜고 카페 하나, 밥집 하나에 전전긍긍하며 유난 떠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별로였다. 보기 싫은 내 모습이 남아 있는 그곳은 그렇게 나와 궁합이 좋지 않은 장소로 낙점됐다.

 

여러 사람의 다른 듯 비슷한 장소 궁합 풀이를 종합해본 후에 나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됐는데, 바로 장소 궁합은 ‘그곳에서 내 모습이 어땠는지’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순수한 몽골 사람들처럼 맑아진 나, 일본 시골 할머니의 속도에 맞춰 행동하는 사려 깊은 나, 북유럽 사람처럼 담백한 일상을 보내는 나. 성공한 여행 서사에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등장했다. 어떤 장소를 거듭 찾아가는 이유도 실은 거기에 데려다놔야만 나오는 자신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제주가 아니라 제주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원피스가 더러워지건 말건 아무데나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는 나. 버스를 놓쳐도 일정이 꼬여도 허허 웃고 마는 둥근 성격의 나. 그 섬에만 가면 시간이 아주 많고 산뜻한 사람으로 지낼 수 있었다. 오만 원짜리 항공권 한 장으로 궁상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꿈꾸던 모습에 닿을 수 있다는 게 때론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토록 자꾸만 가고 싶었나? 내가 봐도 좋은 사람인 나와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가끔 나 자신이 싫어지곤 한다. 사는 게 너무 바쁘고 괴로워서 숨 쉬듯 한숨을 뱉고 아무렇게나 짜증을 내다보면 문득 두려워진다. ‘이렇게 별로인 채로 영영 굳어 버리면 어쩌지?’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바보짓을 여러 밤 반복하고 나서야 도망치듯 제주로 떠났었는데, 앞으론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호를 받은 즉시 나와 합이 좋은 곳으로 떠날 테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나를 만나 예쁘게 웃을 거다.


[864호 – think]

illustrator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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