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슨 옷을 입고 계신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이 글이 옷차림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아디다스를 은근히 흉내 낸 트레이닝 바지에(흰 선이 세 줄이 아닌 두 줄이다)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원고를 쓰고 있다. 한낮에 직장에 가지 않고 이런 옷차림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9년간 편집자로 일하다가 얼마 전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라는 책을 써서 작가로 전직에 성공한 덕이다.

 

9년 전 가을, 나는 졸업을 유예하고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교 5학년생이었다. 취업을 해야 하는데 정작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감조차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용돈이라도 벌자는 속셈이었다. 동기 중 누가 은행을 뚫었다, S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지만 뭘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비 오는 어느 한가한 날, 800번대 아시아 소설 서가를 정리하다가 문득 이렇게 기준을 정했다. ‘무언가를 읽고 쓴다.’ ‘정장은 입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다. 성실하게 살아온 인생에서 취업만큼은 참 실없이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역사 속 모든 계시는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지 않던가, 하하. “왜 편집자가 됐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다 보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동공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옷차림이 그렇게나 중요한 조건이었으면 출퇴근길을 캣워크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의자 위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신축성 좋은 청바지, 별일이 없으면 티셔츠나 맨투맨티, 전문가로 보이고 싶은 날에는 셔츠, 아무 옷에나 척척 어울릴 만한 무채색 스니커즈, 멋은커녕 빈말로도 잘 입었다고 할 수 없는 수수한 옷차림의 소유자가 바로 나야 나.

 

설상가상 뒷머리는 흘러내리지 않게 교정지 집게로 고정해놓고, 옷 곳곳에는 수정펜 자국과 펜 잉크가 묻어 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것은 후배가 말해준 것인데, 이직 후 첫 회식 자리에는 편집자 전원이 에코백을 메고 왔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내가 멘 것도 당연히 에코백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다들 교정지를 집에 가져갈 준비를 하는 거다.

 

겨우 청바지와 맨투맨티, 스니커즈를 사수하기 위해 동기들 연봉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가끔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동화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 역시 그러하지 않았는가. 그는 ‘비 오는 날 젖은 양복을 입고 가게에서 국수를 먹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는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며 대번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결과는? 짠! 그림을 그려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비 오는 날에는 반바지를 입고 국수를 먹을 수 있는 어른이.

 

 

정장을 입고 출퇴근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비슷한 의미였다. ‘자유로웠던 개인은 그만 넣어두고 사회와 조직에 어울리는 어른으로 거듭날 것.’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이기에는 자신이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제대로 된 어른’으로 거듭날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로이 살 용기도 없었던 취업 직전의 어중간한 대학생. 이런 내게 책과 자유 복장이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9 to 6’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지노선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9년 후 이제 책을 그만 만들겠다며 삶의 방향을 틀었을 때 역시 옷차림은 많은 취업 조건 중 단연 0순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다가 이렇게 자유복의 끝판왕인 트레이닝복을 입고 내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되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남들을 따라 살아갔더라면 적어도 트레이닝복을 입고 글을 쓰는 오늘은 오지 않았을 터. 어쩌면 타인의 시선과 가치관에 떠밀려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곳에 떨어져버렸을지도 모르지. 그러한 상황을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운에 나를 맡기는 일이 아닐까?

 

청바지, 맨투맨티, 스니커즈는 내가 아닌 누군가로 살지 말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자신을 지켜주는 갑옷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허접한 가치관이라도 그것을 적절히 고수하는 한, 원하는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마저 친절히 보여주었다. 그러니 여러분 역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정해둔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들을 당당히 고수하시길. 저를 오늘로 인도해준 건 평소 잘 빨지도 않았던 스니커즈들이었다니까요?

 

10년 뒤에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실무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때도 나는 지금과 비슷한 옷들을 입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여기저기 미팅에 나가겠지. 그런 옷차림으로 하는 일들은 분명 지금처럼 즐거우리라 믿는다.

 

이 글을 대강 마무리했으니 이제 편집자 시절 걸치던 옷들을 입고 북토크에 가야 한다. 청바지와 스니커즈, 오늘은 전문가로 보이고 싶으니 셔츠를 골라놨다. 갑옷이라 부르기에는 여전히 허접해 보이지만 오늘도 이것들은 나를 지켜주겠지. 버스 정류장까지 경쾌하게 걸어보자고!


[865호 – think]

Writer 김은경

책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 저자, 전 편집자

Illustrator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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