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코끝에서 기름 냄새가 맡아지는 것 같아요. 설날이 올 때까지 부침개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요. 그때가면 또 징그럽게 맡을 테니까. 저는 추석과 설날만 되면 ‘며느라기’들처럼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20대입니다. 큰며느리의 맏딸인 저는 어려서부터 명절마다 여자 어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컸어요.
너무 당연해서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죠. “이게 뭐지?” 싶었던 건 열 살 무렵 추석이었어요. 다른 어린이 사촌들과 같이 남자 어른들이 먹는 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요. 열심히 먹는 제게 갑자기 다 먹은 그릇을 몰아주시더라고요. 거실에 있지 말고 가서 음식 나르라면서요.
남동생이 저하고 같이 일어서려고 하니까 집안의 제일 큰 어르신이신 할머니의 철벽 방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 거 아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어요? 먹다 말고 홀로 상을 치운 그날 이후, 전 단 한 번도 명절 때 ‘남자’들이 먹는 밥상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어요.
믿겨지지 않으시겠지만 2018년 추석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명절 준비는 최소 이틀이 걸려요. 미리 재료를 사서 손질하는 것부터 시작되거든요. 품이 제일 많이 드는 일은 저랑 엄마가 미리 해놓죠. 명절 당일에 여자 친척들은 도착하시는 즉시 부엌으로 소환되고요. 예외는 없어요.
허리도 못 펴고 송편을 빚고, 전 부치고, 고기 굽고, 국 끓이고 차례상 세팅 다 하고 나면 그제야 남자 친척들이 나타나죠. 수고했다고 재료비를 주기는 커녕 병 주스도 없이 빈손이에요. 몸만 오는데도 세상 당당. 차례에 행차한 것만으로도 할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죠. 준비는 모조리 다 하지만 절도 할 수 없고, 술도 올릴 수 없죠.^^
예전엔 사촌 오빠들이 정장을 입고 절하니, 저도 장녀로서 절할 순서라고 생각해 전 부치다 말고 뒤에 졸졸 붙어 기다린 적도 있었는데. 바로 “여자는 절하는 거 아니야~ 안방에 들어가 있어”라며 제지당했죠. 안방에 가보니, 이미 여자 어른들은 다 모여 계시더라고요.
요즘에는 막내 사촌까지 보고 배워서 “누나 여자는 여기 들어오는 거 아냐”라고 잔소리하니까 민망했나 봐요. “너희도 와서 절 해” 선심 쓰듯 가끔 여자 사촌들을 부르기도 하던데 거절하고 나와 버렸어요. 그깟 절, 이젠 기분 나빠서 하기가 싫습니다. 그 와중에 남자 사촌들이 제 또래라는 게 더 열 받아요.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도 다들 명절 때만 되면 스스로 물을 뜨는 법조차 잊어버리거든요. 요리는 그렇다 쳐도, 다 먹고 난 그릇조차 싱크대에 담가놓는 법이 없어요. 어쩌다 염치가 있는 애들이 설거지라도 도우려고 들면“우리 00이 장가 잘 가겠네! 근데 일손 많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 아주 대견해서 난리가 나요.
마치 부엌이 여자 화장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어르신’들은 거실에 한 덩어리처럼 눕고 앉아서 먹고 놀다가, 갈 때는 명절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기까지 합니다. 막상 일을 한 사람들은요? 차례를 지내고 나면 그때부터 진정한 노동이 시작돼요.
애초에 남자 친척 밥상과 여자 친척 밥상도 따로 있어요. 남자 밥상을 손님상처럼 차리고 물, 후추나 소금 같은 잔심부름도 하죠. 밥을 다 먹으면 다시 술상 차리고, 다과상을 내가고, 그것도 다 먹으면 그제야 여자 상을 차릴 순서가 와요. 예쁘게 차릴 기운이 어디 있나요. 슬프지만 반찬이나 대충 놓고 말아요.
다들 하도 기름 냄새를 맡아서 식욕도 없고 과일 몇 조각 먹고 말아요. 누구 하나 좋은 기분으로 차리지 못한 밥상을 조상님들은 안 체하고 드시고 가셨을까요? 이 집에서 딸인 제가 제사를 물려받진 않겠지만, 노는 사람 따로, 고생한 사람 따로 편 가른 행사를 이어갈 의미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웃으며 나눠먹는 명절이 더 의미 있지 않나요. 물론 저와는 달리, 제사가 지켜나가야 할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20대도 있을 거예요.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단, “모시는 건 내가 할 게 준비는 누가 할래?”라는 안일한 마음만 버린다면요.
[865호 – 20’s but]
※ 정말로 화목한 명절을 꿈꾸는 20대 맏딸과의 인터뷰를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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