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초저녁잠을 자버린 탓에 애매한 시간에 깼다. 시계를 보니 대략 새벽 세 시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김치죽이 먹고 싶었다. 정확히는 이 년 전 퇴사한 후배 Y가 회의실 구석에서 가스버너로 끓여줬던 바로 그 김치죽. 급하게 만든 어설픈 해장음식이 왜 갑자기 먹고 싶어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날따라 평소엔 쥐어짜내려고 해도 안 생기던 의욕이 솟아 들뜬 마음으로 싱크대 앞에 섰다. 간단한 요리라서 레시피를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신 김치를 잘게 다진 후 들기름을 넣고 볶다가 냉동만두와 즉석 밥을 으깨서 섞는다. 물을 자작하게 붓고 치킨스톡(손톱만 한 양으로도 밤새 푹 곤 진한 국물 맛을 내주는 마법의 식재료)을 조금 넣은 후, 육수가 자작하게 졸아붙을 때까지 저어주면 끝! 15분도 안 돼서 완성된 뜨끈한 죽을 냄비째로 몇 숟가락 퍼 먹고는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누웠다.

 

언제부턴가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게 됐다. 재료를 손질하는 일도, 굽고 찌고 끓이는 과정도, 완성된 음식을 예쁜 그릇에 담아 맛보는 것도 모두 즐겁다. 엉망이 된 부엌을 다시 깨끗하게 만드는 일까지 해내고 나면 스스로를 잘 돌보며 사는 기분이라 한껏 뿌듯해진다.

 

나는 낮은 자존감으로 뭉쳐진 주먹밥 같은 존재지만 요리를 할 때만큼은 자신감이 넘친다. 만들어본 적 없는 음식도 대담하게 도전하고 내키는 대로 레시피를 변형하기도 한다. 그래도 제법 맛있다. 물론 요리사가 만든 것처럼 플레이팅이 화려하지도 조리법이 정교하지도 않지만,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모여 기분 좋게 나누어 먹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요리에 재미가 붙기 시작한 건 뭘 만들어 줘도 맛있게 먹는 애인을 만난 이후부터인데, 그 전까진 ‘요리 같은 건 못 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냉동 볶음밥 위에 계란 프라이 하나만 얹어 줘도 “너무 맛있다”며 물개 박수를 쳐주는 사람과 6년이나 만난 덕분에 기분 좋은 착각 속에 살게 됐다.

 

 

그리고 의외로 애인뿐만 아니라 모두들 내가 만든 음식을 좋아했다. 친구들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어설프게 따라 만든 새우 요리나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호들갑을 떨어줬고, 입맛이 까다로운 아빠마저도 “네 엄마가 끓인 찌개보다 낫다”(아빠 언어에 의하면 최고의 찬사다)고 칭찬했다.

 

“간 좀 봐봐. 맛있지? 나 정말 요리에 재능 있는 거 아닐까?” 지난 주말 막 끓인 우거짓국을 후후 불어 애인에게 떠먹여주다가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내가 놀랐다. 재능이라니.

 

초등학교 때 백일장 나가서 장려상 탄 이후로 스스로에게 이런 평가를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를 잘 한다 싶으면 괜히 더 뛰어난 이와 비교하며 소금을 뿌리는 편에 가까웠지. ‘이 정도 재능으론 잘하는 축에도 못 껴’ 그러던 내가 지레 주눅 들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 들지도, 더 잘하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스스로를 인정하다니. 새삼 신기했다.

 

그건 아마도 내게 요리가 ‘그 정도’로만 잘 해도 되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요리사도 요리사 지망생도 아니니까. 내 음식을 사람들에게 판매할 필요가 없다. 내 돈으로 재료를 사서 내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한 후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먹이면 된다. 대가를 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가는대로 뭐든지 시도 할 수 있다. 인스턴트 소스를 사용해도 조미료를 넣어도 오케이다. 어쩌다 만듦새가 좀 허술하거나 간이 센 음식을 만들어도 다들 웬만하면 정성을 봐서 박수를 쳐 준다. 파는 게 아니니까.

 

만약 돈을 받고 판매하는 음식이었다면 깐깐한 평가를 면할 수 없었겠지. “맛있긴 한데 이 돈 주고 먹을 음식은 아닌 것 같아요.” “이거 시판 소스 쓰신 거 아닌가요?” 그런 말을 들었다면 감히 재능이니 재미니 운운하며 즐거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생 팔지 않는 것만 만들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그 정도로만 해도 되는 일’보다는 ‘최고로 잘 해야만 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잘 하는 게 중요해.” 동아리 선배가 하는 말을 들으며 솔직히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그 말이 맞았다. 내가 리포트에 아무리 공을 들였다 한들 나보다 더 잘한 사람이 있으면 A+를 받을 수 없었다. 또 평소보다 면접을 훨씬 더 잘 봤는데도 다른 지원자에 비해 덜 매력적이라 탈락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항상 ‘더 잘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내가 만든 것을 팔아야만 또 그게 팔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 세상에서 최고로 잘 하진 못 해도 그럭저럭 해내기만 하면 칭찬받는 구석을 찾았다는 건 꽤 운이 좋은 일이겠지.

 

생계를 유지해주는 일, 내가 파는 것에 대한 평가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면 사는 게 의미 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 그럴 땐 요리를 해야겠다. 줄 서서 사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비매품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으며 짓는 표정을 공들여 담아둘 테다. 어쩌면 인생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팔지 않을 작정으로 열심히 만든 것에.

 


[875호 – think]

illustrator 강한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국민 주거고민 맞춤형 해결사 등장!


펜타곤 진호 & 오마이걸 효정의 콜라보 무대가 열린다

인스타그램 @univ20에서 4/18(목)까지 초대 EVENT 진행!

 

‘내가 만드는 해치’ 콘텐츠 공모

총 상금 1,740만원, 4월 24일까지 접수!

 

졸업작품에 2,300시간을 쏟은 동국대생

“완벽하게 끝낼 게 아니라면 시작도 안 했어요”

 

최대 240만 원, 서울시 청년 월세 지원해드립니다

지금 바로 '서울시 청년월세지원' 지원하자!

 

코딩을 무료로 배울 수 있다고?

코딩부터 면접까지 취업 올케어

 

문화예술 콘텐츠 기획/창작 취준생을 위한 비대면 무료 교육

총 150명 선발

 

문화/예술/콘텐츠 분야 취준생을 위한 무료 교육 설명회

문화 예술 기획, 창작 전문가 양성 교육과정

 

1등 500만 원? 놓치면 후회하는 콘테스트

상금 규모에 취하는 '진로 두꺼비 스타일링 콘테스트'

 

❛지구 반대편에서 할머니의 집밥을 기록합니다❜ 미뇨끼 인터뷰

대한민국에서 우리집 이탈리아의 따뜻한 요리 영상을 만드는 미뇨끼 이야기

 

팔지 못하는 재능을 어디에 쓰냐 하면

 
시리즈 로즈뷰티

어디서도 보지 못한 친절하고 정직한 뷰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