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하게 피드를 넘기다 ‘생일로 보는 2019 운세’라는 게시물에서 멈췄다. 어디 보자. 1월은 ‘바라던 대로’, 19일은 ‘걱정이 없어진다’. ‘귀여워서 반반무 먹는 사람’ 같은 아무 말 조합이 나올 줄 알았는데 꽤 그럴듯하다. 아니, 솔직히 심장 떨렸다. 바라던 대로 걱정이 없어진다니. 어떻게 알았지? 내가 걱정 장인인 걸.

 

나는 쫄보다. 남자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뭐 하늘이 무너질까 무서워하는 수준’의 쫄보다(영감탱 가만 안 둬). 분해도 반박은 못 했다. 살면서 한순간도 쫄지 않고 무사히 지나온 날은 없었으니까. 당장 연말만 해도, 태국 바퀴벌레 목격담 하나를 가지고 여행 떠나는 날까지 벌벌 떨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피할 수 있을까.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과 발로 방콕 호텔 후기를 40페이지나 뒤졌다. 사실 금방도 겁먹었는데 한껏 태연한 척하고 있다. 앞에서 은근히 생일 노출한 것도 걸리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나 조심스럽고….

 

그다지 대범한 사람으로는 못 살 거란 예감은 일찍부터 있었다. 쫄보의 씨앗은 경쟁 사회에 막 입문한 초등학생 때 이미 움텄으니까. 자전거, 인라인 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바퀴’ 달린 것들하곤 유독 악연이었다. 내가 넘어질까 무서워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동네 친구들은 신나서 저만치 앞서 가버리곤 했다. 마구잡이로 따라잡으려다 피를 보고야 쓸쓸히 집에 가기도 수차례. 그즈음 우리 집은 언덕에 있었는데, 오죽 스트레스였으면 밤마다 악몽을 꿨다.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언덕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꿈이었다.

 

가끔은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로 펌프질되기도 했다. 1년에 3일만 열심히 쓰는 일기처럼 딱 학기 초 한정인 용기였다. 어떤 3월에는 호기롭게 4단 뜀틀에 덤볐다가 손가락 인대가 끊어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또 어떤 4월에는 식은땀 나는 함수 문제와 정면 승부를 하다가 3,3,3,3으로 내리 마킹한 OMR 카드를 제출해야 했다. 그때 깨달아야 했었는데. 쫄보는 용기에도 급체할 수 있다는 걸.

 

대학에 와서 제일 좋았던 건 체육과 산수를 더 이상 안 해도 된다는 거였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인생에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가 비로소 등장한 거다. 더 이상 끼워 맞추기 위해 날 비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듣고 싶은 수업으로만 시간표를 채웠고, 함께하는 게 즐거운 친구하고만 만났다. 그렇게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로 끝난다면 좋으련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하고 싶지 않은 일’ 목록이 추가될 때마다 겁쟁이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밤새워 이력서를 보냈지만 한 군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알바하다 하루아침에 잘렸을 때, 블랙 기업에 입사해서 밀린 월급을 받아내야 했을 때…. 실패한 모든 순간들이 내가 겁쟁이인 탓으로 느껴졌다. 좌절은 당연한 대가라고 여겼다. ‘겁이 많고 덜렁대서 그래’ 부러 나서서 스스로를 회초리질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내 안에서 결점을 찾지 못해 안달했을까.

 

“두려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처음엔 이 카피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의지로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니 얼마나 훌륭한가. 땀, 눈물, 고난을 헤쳐 나가는 영웅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잖아. 자꾸 듣다 보니 나도 내 안의 겁쟁이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세상엔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도 많다는 걸.

 

두려움이 어떻게 별게 아니야. 두려움은 대단히 별건데. 그래서 한계와 싸운 사람들이 찬양받는 것일 테다. 의지로 위기를 극복해낸 사람들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극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생에서 앞으로도 두려운 일은 매일같이 있을 테고, 매번 동화처럼 평온한 결말만 맞진 않을 것이므로. 게임처럼 치트키를 쓸 수도 없겠지. 무술 실력을 999로 올려 악당을 때려잡을 수도 없고, 알바만 죽어라 한다고 거부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비루한 능력치의 ‘나’에겐 ‘돌다리도 겁을 내고 건넌다’는 선택지가 최선 아니었을까. 비겁해서 도망친 게 아니라, 비정한 현대사회로부터 나름대로 자기 방어전을 펼쳐 온 셈이지.

 

순진하게 쫄보도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시절. 최애 영웅은 ‘빨간 머리 앤’이었다. (어쩐지 친근해서 허들이 낮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용감했다. 아무리 우울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불가능한 일도 꿈꾸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보통 사람일 거라는 가정부터 틀려먹었으니까. 무례한 사람이 선을 넘는다고, 석판으로 머리를 후려갈길 수 있는 용기를 아무나 낼 수 있을 리가…!

 

다행히도 쫄보는 포기가 빨랐다. 앤이 될 수 없어 앤을 미워하기 전에, 내 안의 겁쟁이를 보듬어주며 살기로 했다. 겁쟁이로 사는 건 생각 외로 즐겁더라. 약간 지질해 보여도 많은 부분을 나름의 방식으로 두드려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됐다. 행복해지는 덴 의외로 대단한 용기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겁쟁이의 속도로 한 걸음씩 헤쳐 나가는 정도. 딱 그 정도로도 충분한 걸 보면.


[876호 –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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