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에서 모두가 이순신에 주목할 때, 조국을 배신한 일본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드라마 <조선총잡이>에서 그는 또다시 일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점점 이 남자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만난 오타니 료헤이는 난감한 질문에도 신념에 찬 목소리로 진심을 말할 줄 아는 멋진 남자였다.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준사 역을 맡지도 않았겠죠.

 

조국을 믿었기에 배신할 수 있었다

 

검색창에 ‘오타니 료헤이’라고 치면 가장 먼저 뜨는 연관 검색어가 ‘일본 반응’입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조국을 배신하는 역할이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답하셨어요. 솔직히 부담은 됐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보였기에 배역을 맡았어요. 저는 시나리오를 볼 때 외부 요인은 배제하고 오직 스토리와 캐릭터만 봐요. 한일 양국 간의 과거사, 이순신이라는 주인공의 상징성. 이런 것들은 고려 요소가 아니었죠. 조국을 배신하고 적장을 돕는 캐릭터가 배우로서 정말 매력적이었기에 개의치 않고 준사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를 본 입장에서 ‘준사’란 캐릭터가 100% 이해되진 않았어요. 저 사람은 어쩌다 항왜 장수가 된 것이며 어떤 역할인지, 개연성 측면에서 조금 설명이 부족하다 느꼈어요.

촬영 때 엄~청나게 많은 씬을 찍었어요. 시사회 때 완성된 작품을 처음 봤는데 정말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숨고 싶더라고요.(웃음) ‘준사’ 역에 끌렸던 가장 매력적인 장면이 아쉽게도 편집됐거든요.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일본쪽에 정말 좋은 대포가 들어왔어요. 조선 입장에서 그건 당해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기였는데, 준사가 무기를 폭파시키고 조선 쪽으로 투항해요. 긴박한 추격 과정이 영화엔 나오지 않아 아쉬웠죠.

 

일본 현지의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다들 잘 봤다고 좋은 말만 해줬어요. 오히려 한국 인터넷 기사에서 ‘조국을 배신한’이란 표현을 써가며 저를 걱정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솔직히 그런 불안감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어요. 제가 아는 일본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영화 속캐릭터에 몰입해 화낼 사람들이 아니에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잖아요.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준사 역을 맡지도 않았겠죠.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겠죠.

 

 

데뷔 초를 제외하곤 드라마나 영화에서 줄곧 강한역만 맡고 있어요.

제 기본적인 외모가 그런 느낌을 주니까요.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려 해도 화면을 보면 미간을 찌푸리며 눈에 힘을 주고 있더라고요. 밝은 캐릭터를 맡아도 어딘지 모르게 세 보인다는 얘기도 많이 듣고요. 반면에 고뇌에 빠진 표정이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표정은 거의 NG 없이 OK가 나요.

 

배우로서 당신이 갖고 있는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잘생긴 얼굴 하나만으로 일본 출신 배우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거울을 보며 잘생겼단 생각은 안 하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정말 좋다고 느껴요. 눈빛에 대한 자신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믿습니다. 저와 일했던 감독님들도 제 눈빛에서 풍기는 느낌을 보고 캐스팅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배우’의 기준이 궁금해요.

실제 모습이 매력적인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된다고 생각해요. 프로 연기자라면 누구나 기술적으로 연기를 하지만, 진짜 모습과 전혀 다른 연기는 존재하지 않거든요.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최민식, 류승룡 선배도 마찬가지예요. 평상시 말투, 눈빛, 행동이 연기할 때 다 묻어 나와요. 인위적으로 만든 감정과 표정은 티가 날 수밖에 없어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겠죠.

 

 

한국은 일터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

 

한국에 오신 지도 어느덧 10년이 됐어요. ‘배우 료헤이’ 이전 대중이 모르는 ‘평범한 일본인 료헤이’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요.

대학교 때까지 배구를 했어요. 취미로 한 게 아니라 진지하게 선수로 활동했었죠. 근데 배구를 하려면 키가 190cm까지는 커야 하잖아요. 제 키가 지금 180cm인데 선수로서 한계를 느끼고 그만뒀죠. 배구는 아무리 운동 능력이 좋아도 신체적 조건이 절대적인데, 이건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잖아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죠.
성인이 된 후에 배구를 그만뒀으니 앞길이 막막했겠어요.

배구를 그만두고 커피숍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형 중에 모델이 한 명 있었어요. 그 형 추천으로 운 좋게 모델 기획사에 들어가게 됐죠. 얼떨결에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걱정이 많았어요. 모델이라 하면 키 188에 마른 체형, 주먹만한 얼굴을 상상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일이 술술 잘 풀리더라고요.

 

그러다 어떤 계기로 한국 진출을 하게 되신 거죠?

일본에서 활동하며 한국 광고를 몇 번 찍었었는데, 저를 좋게 봐주신 회사가 있었어요. 한국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를 받았죠. 전부터 해외에 나가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두려움보다는 ‘재밌겠다, 한번 해보자’ 이런 생각이 앞서더라고요. 잘 안 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고. 사실 전에 한국에서 찍은 광고들이 워낙 잘되다보니, 실패에 대한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어요.(웃음)

 

 

지금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많이 생각하죠.

 

 

데뷔 초엔 지금과 비교해 연기에 대한, 언어에 대한 이해가 훨씬 부족했을 텐데. 그런 애로 사항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땐 극복이라는 걸 떠나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인생의 절반을 배구만 하며 보냈으니 연기에 대한 기초는 당연히 부족하고, 한국어도 배우고 있는 과정이었지만 어려웠고요. 그래도 뻔뻔한 생각이 있었어요. ‘아… 나 못 하는데, 어떡하지?’란 걱정보다, 제가 연기도, 언어도 부족하지만 그걸 채워줄 만한 무언가가 있기에 캐스팅됐을 거라 믿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할 수 있는 것 들을 열심히 해나갔죠.

 

데뷔 이래 여러 작품을 해오셨지만 <명량> 이전에 모든 국민이 알 만한 대작은 없던 게 사실입니다. 낯선 타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묵묵히 기다릴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한국에 살면서 ‘일’만 생각했으면 못 기다렸을 거예요. 일만 보고 살아가는 데 일이 없으면 한국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일이 없을 때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 제가 지금 일 때문에 한국에 있긴 하지만 저는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면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일만 쳐다 보고 살았다면 아마 진즉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엔 한국이라는 나라와 인연이 있다고 느꼈어요. 배구 선수 시절에도 시합 때문에 자주 왔었고, 모델 일을 하며 처음으로 들어온 일도 한국에서였고요. 지금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많이 생각하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여긴 그 사람들이 사는 나라고, 그 사람들의 고향이니깐. 자연스레 저도 한국에 정이 가요.

 

 

 

 

“한국 대중이 원하는 일본 배우의 모습에 제가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바람만 좇다보면 그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대중을 기만하는 게 되는 거잖아요”

 

 

냉랭한 한일관계 어쩌면 그가 답이다

 

한국인은 유독 애국심이 강해요. 다른 문화, 특히 역사적으로 앙금이 남아 있는 일본에 대해선 여전히 배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한국 진출하기 전, 부모님께서 한국 역사책을 많이 선물 해주셨어요.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다보니 한국인의 애국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됐죠. 한일 문제는 민감한 문제인 만큼 양국 간의 입장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니 개인의 기준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해요.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차이를 인정하며 겸허히 받아들여야죠.

 

많은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반해, 한국에서 자리 잡은 일본 출신 스타는 거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유리 천장’을 뚫고 지금보다 더 성공할 자신이 있으신지요.

기대도 있고 욕심도 있어요. 그렇다고 무리하고 싶지는 않아요. 한국 대중이 원하는 일본 배우의 모습에 제가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바람만 좇다보면 그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대중을 기만하는 게 되는 거 잖아요. 자연스럽게 제 매력을 연기에 녹여내다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분들에게 인정받는 날들이 올 거라 믿어요.

 

조금 민감한 질문 하나 드릴게요. 한일 양국의 기성 정치인들은 여전히 과거사 문제를 놓고 날 선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료헤이씨가 한일을 아우르는 배우로서, 나아가 ‘문화인’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조금 거창한 말이긴 한데 <명량> 김한민 감독님이 기자회견때 저를 가리키며 한일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라고 얘기하셨어요. ‘준사’ 역을 두고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이 역할은 부담이 되겠지만 그걸 극복하고 네가 양국의 다리를 놓는 배우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죠. 그 말이 제겐 큰 용기가 됐어요. 정말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지금 보다 더 높이 날 수 있는 배우가 돼야겠죠.

 

2014년은 배우 ‘료헤이’의 이름과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한 해입니다. 앞으로의 목표를 들어보고 싶어요.

개인적으론 일본인이나 강렬한 캐릭터같이 제게 어울리는 역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단 생각을 합니다. 그 역을 꼭 제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배역을 저 말고 다른 배우가 하면 많이 분할 것 같아요. 지금처럼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차곡차곡 잘 해나가 좀 더 다방면의 연기를 해도 좋을 것 같고요. 인지도가 많이 올라간 만큼 책임감, 사명감도 덩달아 생기고 있어요. 부담을 느끼며 뒤로 숨는 배우가 되기보단, 사람들에게 당당히 제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늘 연구하며 노력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Editor 이민석 min@univ.me

Photographer 박경섭 Studio 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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