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 같은 어른은 누굴까?”

이 질문에 왜 나는 ‘감자인형’이 생각났을까. 감자인형은 우리 과 고학번 선배다. 왜 감자인형이냐 하면 생김새가 영화 <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감자인형을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병원 봉사 활동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봉사 활동 장을 맡고 있었는데, 항상 염가에 대량으로 데려갈 봉사 활동 지원자를 구하느라 혈안이 돼있었다. 어느 날 그가 학과 신입생 카페에 지원자 모집 글을 올렸다. “봉사도 하고 선배도 만나는”, “새내기 필수 코스”, “마감 임박” 같은 주옥같은 카피가 인상적이었는데, 우리 과가 광고홍보학과라는 걸 생각하면 배운 걸 알차게 잘 써먹는구나 싶었다.

 

감자인형은 ‘님이 왜 학교에…’ 싶게 고고고학번이었지만 너무 체통이 없어서 전혀 고학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바보멍게해삼말미잘아~’ 같은 초딩들이나 쓸 법한 농을 남발하여 보는 이를 질색케 했다. 나는 도저히 그 정신연령을 선배나 오빠라고 부를 수 없어 그냥 이름 석 자를 호명하고 말도 놓기로 했다.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나는 봉사 활동을 다니며 감자인형과 친해졌고 가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럼 그는 예의 그 감자 같은 얼굴로 쳐다보며 “내가 너보다 멍청한데 왜 나한테 물어봐?”라고 답했다. ‘세상에 내가 누구한테 고민 상담을…’ 후회가 막심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는 내 고민 상담을 묵살하는 대신 책을 한 권씩 가져다줬다. “나는 너보다 별로니까 그냥 책을 추천해줄게. 원래 사람보다 책이 더 똑똑해!” 그렇게 한 권 한 권 읽은 게 의도치 않게 내 20대 초반의 독서 리스트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책들은 내가 그때그때 고민하던 문제들과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책을 읽으면 그가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조언이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스물 언저리의 젊은이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젊었을 때 왜 그렇게 못 했을까’ 하는 후회 때문인지,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너는 왜’ 하는 안타까움 때문인지는 모르겠다(혹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을지도).

 

그런 말들에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선한 의도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선의는 주로 내게 닿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사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들은 나를 이해하고 조언을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세상에 빗대어 내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상상력은 대체로 빈약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애초에 내게 닿기 위한 조언이 아닐 때도 있었다. 말하는 이의 위력을 증폭시키기 위한 조언. 질서와 서열의 위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조언. 그런 말들은 조언이라기보다 플라스틱 같아서 여러 날 동안 썩지도 않고 몸을 해롭게 했다.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그들 스스로 어른다울 수 없어 남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윗사람이 되고자 했다.

 

나는 그런 어른을 만날 때마다 ‘내가 너보다 별로니까’라고 말하던 감자인형을 생각했다. 감자인형은 내 일에 관해선 ‘니가 알아서’ 정도의 태도였다. 노잼 개그는 곧잘 떠들어댔지만 조언을 할 때만은 말을 아꼈다. 이런 게 좋다, 저런 걸 하라, 라고 말하기보다 내게 되물어서 나 스스로 생각해보게 했다.

 

그런 되묻기는 김이 서린 유리에 뿌리는 물줄기 같아서 내가 처한 상황을 명료하게 만들어 주었다. 근데 혹시 답변을 생각하기 귀찮았던 건 아니겠지? 그가 신중한 사람인지 그냥 생각이 없는 건지 가끔 헷갈린다.

 

그는 그저 자기 인생에 충실했다(이렇게 말하니 고인이 된 느낌이지만 산 사람이다). 신중하되 단순하게 생각했고, 선택한 후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진지하게 임했다. 감자인형은 “난 햄버거 좋아하니까 햄버거 가게 차려야지”라고 말하더니(다들 농담인 줄 알고 유쾌하게 웃었다) 정말 수제버거 가게 사장님이 되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그걸 실천한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진지한 인생인지! 그를 보며 삶이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말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내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가끔 고민스러운 일이 생기면 ‘감자인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명사 특강 같은 데에서 들은 건 다 잊어버렸지만 그가 내게 준 책들과 그를 보며 느꼈던 건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그는 나에게 닿을 수 있는 방식으로 조언을 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겉보기의 멍청함과는 달리 내게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 앞으로 그를 어른 대접 해줄 거냐고 묻는다면, 음, 그건 또 아니지만.

 

감자인형 추천 도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 아픈 이야기』, 『생의 한가운데』, 『호밀밭의 파수꾼』, 『달과 6펜스』 등등.

[기획기사-좋은 어른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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