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은 존 레논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이 체포 직전 읽고 있던 책으로 유명합니다. 1951년 출간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700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에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 고전 2위이기도 하고요. (1위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그래서 제목은 참 유명한데 막상 실제로 읽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루해 보이는 제목이 한몫하는 것 같아요. 왠지 교훈적인 옛날이야기일 것 같은 제목과는 달리, 사실 이 책은 중2병에 걸린 반항아가 가출해서 겪은 일을 담고 있습니다.
16살짜리 남자애가 욕하고, 술 마시고, 싸움하는 그런 이야기. 읽고 있으면 사춘기 혹은 대춘기 시절 내 일기장을 보는 기분이 들 겁니다.
주인공 홀드 콜필드는 세상에 불만이 많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궁시렁거리죠. 변호사인 아버지도 싫고, 재수 없는 놈들만 모인 학교도 싫고, 폭력적인 수업 방식도 싫고. 요즘 나오는 반항아 캐릭터의 조상님쯤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항아 콜필드는 각종 이유로 매번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지금 다니는 학교는 무려 4번째 학교인데, 이번에도 역시 퇴학을 당해요. 공부를 안 해서 낙제를 했거든요. ‘못’해서가 아니라 ‘안’해서 입니다. 그는 특히 말하기 수업을 싫어했어요.
말하기 시험에서는 낙제를 했어요. 아이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연설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연설을 하던 아이가 조금이라도 주제에서 벗어나게 되면 모두들 “탈선”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중략)
그렇게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아이한테 “탈선”이라고 소리지르는 건 비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밀밭의 파수꾼> 242p
문제아 딱지를 붙인 콜필드를 모두가 걱정하지만 그는 시크합니다. 걱정을 가장한 훈계를 하는 어른들에게는 가차 없이 돌직구를 날려요.
“장래에 대해서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스펜서 선생이 말했다.
“선생님. 저는 괜찮을 거예요. 이건 한순간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저도 그런 겁니다. 선생님. 제발 더 이상은 제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호밀밭의 파수꾼> 28p
이 아이가 이렇게 냉소적으로 변한 데는 동생 앨리의 죽음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끼던 동생 앨리가 백혈병으로 죽자 콜필드는 크게 상심해요. 몰래 차고로 들어가서 유리창을 맨손으로 다 깨서 크게 다치기도 하죠.
사랑스러운 동생 앨리는 죽고 가식적인 어른들만 남은 세상이 싫었을 겁니다. 가만히 있다간 자기도 그저 그런 어른이 될 테니 계속 방황했을 거고요.
4번째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콜필드는 가출을 감행합니다. 기숙사에 계속 있기엔 애들도 싫고,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혼날 테니까요.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 콜필드라는 16세 소년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가출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그 3일간의 이야기입니다.
학교를 나온 콜필드는 막상 갈 곳이 없어요. 뉴욕 거리를 헤매며 하염없이 외로워하죠. 스스로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으면서 외롭다고 징징대는 것. 우리가 흔히 겪는 중2병 증상과 비슷합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기랑 “술 한잔 하지 않겠냐”고 권합니다. 그것이 택시 기사건, 친구의 엄마건, 창녀이건 상관하지 않아요. 그저 함께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할 뿐.
가출한 2박 3일 동안 콜필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매번 초라한 일들을 겪어요. 매춘부에게 잠자린 됐으니 대화나 하자고 했다가 비웃음을 사고, 포주에게 돈 뜯기고 얻어맞고. 그러면서도 계속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죠. 어딘가에 기대고 머물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는 거에요.
“언제까지 이런 지겨운 얘기를 계속해야 되는 건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그가 나를 버려두고 가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을 한잔 더 시켰다. 정말 취하고 싶었다.
(중략)
“한잔 더 하고 가. 부탁이야. 정말 외로워서 그래. 장난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그는 안 된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호밀밭의 파수꾼> 200p
콜필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을 돌아보게 하는 캐릭터입니다. 누구에게든 전화하고 싶은데,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초라하고. 혼자 있기 싫어서 아무나 만났다가 괜히 상처받아서 힘들어하고. 콜필드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상처받는 모습이 왠지 날 보는 것 같아서, 독자는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진 콜필드는 부모님 몰래 집으로 가서 여동생 피비를 만납니다. 그리고 어린 동생에게 혼쭐이 나죠. 세상 모든 게 불만이면서 대안은 없고 궁시렁거리기나 하고, 퇴학이나 당한다고. 동생은 그에게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어요. 이때 나온 대답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이죠.
콜필드는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순수한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해요. 속물이 아닌 아이들의 순수한 상태를 유지 시켜 주고 싶은 콜필드의 바람이 담긴 직업이죠. 콜필드는 시간이 지나 무언가 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순수했던 아이가 성장해서 속물적인 어른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해요.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십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중략)
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 진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 두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호밀밭의 파수꾼> 164P
집 밖을 헤매던 콜필드는 폐렴에 걸립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콜필드가 동생이 회전목마 타는 것을 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가출 사건은 마무리 돼요. 그는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아마도 병원에 입원한 것 같아요. 정신과 치료도 받은 것 같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예정인 것 같습니다. 가출 사건을 겪은 콜필드는 어딘지 모르게 차분해졌어요.
난 올라갈 때와는 다른 계단으로 내려갔는데. 그곳 벽에서도 ‘이런 씹할’이라는 낙서가 있었다. 다시 손으로 문질러 지워버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칼 같은 거로 새겨져 있어서 지울 수가 없었다. 하긴 쓸데없는 일이기는 했다. 백만 년을 걸려서 다 지우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전 지구상에 쓰여 있는 <이런 씹할>이라는 낙서의 절반도 지우지 못할 테니까. 그걸 전부 지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265p
아이들을 순수한 채로 보호하고 싶었던 콜필드는 변화를 인정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이런씹할’이라는 낙서를 보지 않았으면, 그런 말은 몰랐으면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게 되겠구나. 세상엔 어쩔 수 없이 훼손되는 것들이 있구나. 체념해요.
소설은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쓸쓸한 독백으로 끝납니다. 이미 한 시기를 지나와 버렸으니, 그 시기에 대해서 말을 하면 그리워 진다는 뜻인 것 같아요. 자신을 두들겨 팼던 친구도, 코웃음을 쳤던 매춘부도. 이제는 없는 사람들이니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거죠.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2가지입니다. 이게 왜 명작인지 모르겠다는 반응과, 콜필드를 보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감정 이입이 심하게 된다는 반응.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후자의 느낌을 받을 거에요. 세상에 싫은 게 많고, 불만이 많은 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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