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 가사 한 줄이 귀에 꽂혔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시간이 지날수록 설레임보다는 편안함이 자릴 잡나요”

 

세상엔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다

불꽃 같던 사랑이 사그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제법 점잖은 조언도 있었고(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고, 편안함도 사랑의 일종이다),

과학적인 조언(호르몬의 한계 때문에 사랑의 유효 기간은 길어야 3년)도 있었다.

 

 

정말일까? 모두가 그렇게 사랑하고 있을까? 닿으면 손이 델 듯 뜨거웠던 눈빛이 미지근해 지고, 하루만 못 봐도 애탔던 연인을 한 달 넘게 못 만나도 무덤덤해지는. 그 과정을 받아들여 가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항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게 무슨 사랑이야. 정이지.’

 

화가 김환기와 그의 아내 김향안은 내게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다’고. 그들은 사는 동안 서로를 뜨겁게 원했다. 떨어져 있을 때마다 남편은 그새를 못 참고 편지를 썼다. 남편이 먼저 죽고 난 뒤에 아내는 남겨진 작품을 돌보며 죽는 순간까지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흔적은 부암동 자락에 ‘환기미술관’으로 남았다.

 

부암동 환기미술관 입구

 


연애편지로 시작된 사랑

나는 김환기라는 이름을 미술 교과서에서 처음 봤다.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3대 화가로 꼽힌다고. 필기시험을 준비하며 외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렇게 스쳐갔던 화가에 뒤늦게 매료된 건, 다름 아닌 그의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의 책 표지도 김환기가 그렸다

 

김환기와 김향안은 초혼이 아니었다. 향안의 첫 번째 남편은 시인 이상이었다. 이상과 사별한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났다. 처음에 김향안은 김환기에게 관심이 없었다. “키만 큰 시골뜨기”정도로 생각했을 뿐. 하지만 김환기는 김향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첫 만남 이후 부지런히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가 향안의 마음을 열었다.

 


김환기는 편지를 참 잘 쓴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글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정이 넘쳐 흐르는. 그러나 나는 곧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 일방적으로 또 편지가 왔다. 그러는 동안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던 우리는 편지로써 가까워졌다.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中


 

우리는 아름답게 살자고 맹세했다.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모른다면 그 가정생활은 절름발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향안과 환기는 우연히 만났지만 운명처럼 잘 맞았다. 그들은 함께 좋아하는 것이 많았다. 김환기는 백자 항아리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향안 역시 그것을 좋아했다. 살림이 어려울 때도 남편이 새 항아리를 사오면 나무라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피우든 아무 소리가 없다. 돈을 못 벌어오는 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아내는 능금을 좋아하는데 궤짝으로 사다 두고 먹여 본 적이 없다. 과용하고 돌아오는 길, 가다가 몇 알 사들고 와서 손에 쥐어 주면 그만 어린애 같이 좋아한다. 나는 아내가 능금을 움푹움푹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김환기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中


 

그녀는 예술가의 아내를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누구보다 프로답게 해내려 했다. 어느 날, 김환기가 지나가는 말로 “프랑스에 가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다음날 바로 불어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프랑스로 떠나 화가의 작업실(아틀리에)을 구하고, 불어와 예술을 익혔다. 그렇게 익힌 불어는 남편을 위해 활용했다.

 

신문에 피카소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김환기는 피카소를 좋아했다) 번역 후 타이핑해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고, 언어가 서툰 남편을 위해 공식 석상에서 통역사 역할을 하는 등 향안은 그의 완벽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가정생활은 다소 절름발이 격이 되지 않을까. 부부란 서로의 호흡을 공감하는 데서 완전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인 줄로 안다. 자기가 전공한 것이 미술이 아니라도 미술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미술에 대한 기본 공부를 해보는 것은 남편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기도 하려니와 자기 자신의 정신 생활 또한 그 만큼 폭넓게 하는 길이 될거다.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中


떨어져 있어도 항상 당신을 생각해요

 

앞서 말했든 환기는 향안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특히 떨어져 있는 동안은 지금의 우리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듯, 자주 편지했다. 서울에서 프랑스로, 뉴욕에서 서울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작품이 잘 안 풀려도, 바빠도, 혹은 기분이 좋아도. 그는 항상 아내를 생각했다.

 

김환기가 김향안에게 쓴 편지

 


맥주를 마시며 그림도 바라보고 창도 내다보고 하는 동안에 아주 캄캄해졌어요. 지금 서울은 새벽인가. (중략) 현대라는 세상은 정말 살 재미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하면 재미나게 살 수 있지? 작년 이맘때 우리 강 내다보구 살았나. 신석동 내려서 걸어서도 들어오고 버스도 타고 들어오고, 호주머니에 푼전이 잡히면 엿도 사가지고 들어갔어요.

 

김환기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中


 

향안에 대한 사랑은 그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직 그녀를 위한 그림으로 작은 스케치북 3~4권을 채워 화집을 선물하기도, 추상화에 아내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 주고, 완벽하게 내조해 주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편, 내조에 대해 향안은 이렇게 정의했다. “내조라는 말은 다소 쑥스럽다. 우리 부부들은 이미 협조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부창부수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인 듯하다.

 

김환기가 김향안을 위해 그린 그림들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같은 화가이자 예술가로서 피카소를 존경했던 김환기는,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자 급격히 기력을 잃었다.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그림에만 몰두하던 그는 결국 몸이 크게 상했고, 병원에서 목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이대로는 그림을 더 그릴 수 없겠다는 판단 끝에 수술을 결정한 화가는 그만 수술 중 목숨을 잃고 만다.

 

그 순간을 아내 향안은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정말 죽은 것일까?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슬퍼하기도 잠시. 그녀는 누구보다 훌륭했던 화가, 남편 김환기를 세상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 곳곳을 돌며 김환기의 작품을 전시하고, 책도 냈다. 힘들 때면 남편이 선물한 화집(자신만을 위한 그림으로 가득한)을 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외롭다면 감정의 사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남의 집을 빌려 남편의 작품을 전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집을 만들자고. 남편의 작품을 가장 돋보이게 해 줄 미술관을 만들자고. 그것은 살아생전 김환기의 소망이기도 했다. 남편은 몰랐을 것이다. 일기장 한 켠에 적어둔 꿈이 현실이 될 줄은. 자신이 죽은 뒤 아내가 그 꿈을 현실로 이루어 줄 줄은.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환기미술관”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지금의 환기미술관이다. 단순히 고인을 기리는 위한 곳이 아니다. 이곳은 화가 김환기의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미술관 곳곳에 아내의 생각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환기미술관 전경

 

두드러진 점은 다른 곳보다 천장이 높다는 것인데, 이는 김환기가 작품 대부분을 대형 캔버스에서 작업했기 때문이다. 작품이 크기 때문에 천장이 낮으면 관람에 방해가 된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고려해서 지은 곳이기에, 환기미술관에서 김환기의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김향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시가 진행 중인 환기 미술관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는 김향안이 자신과 남편을 생각하며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입장권을 끊다가 본의 아니게 할머니와 큐레이터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내가 사실 생전에 김환기를 본 적이 있어. 부산 피난 왔을 때 만났는데, 내외가 사이가 그렇게 좋더라고.”

 

 

새소리가 정답고 꽃 향기가 은은한 봄날. 부암동 자락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환기미술관

위치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40길 63
전화번호 02-391-7701
영업시간 10:00-18:00 (월요일 휴관)
전시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展, (~8월 14일)

자료 제공 환기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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