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가도 이보다 근사한 바다는 없다
금능 해변
+ 협재 펍 ‘모살’의 직원인 길영배의 추천
아끼는 사람을 제주에 데려가고, 그 사람에게 단 하나의 바다를 보여줘야 한다면, 금능 해변에 가고 싶다. 저 너머 『어린왕자』 속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닮은 섬 비양도가 보이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동동 떠 있는 풍경은 언제 봐도 감탄스러우니까.
에메랄드 빛 바다는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면 하염없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듯이 얕고 잔잔하다. 왼편으로는 제주 전통 고기잡이 양식인 ‘원담’도 보인다. 밀물에 몰려든 고기 떼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까만 돌담을 쌓은 것으로, 이 마을엔 여전히 원담을 지키는 ‘원담지기’ 할아버지도 있다. 그야말로 제주다운 풍경을 모두 가진 해변.
근처 협재 해변보다 덜 알려져 상대적으로 한적한 점도 마음에 든다. 낮에 보는 에메랄드 빛 바다도 예쁘지만, 노을이 질 무렵엔 잊지 못할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김신지
복잡했던 생각이 훨훨 날아가는 곳
하도 해변
+ 이별 후엔 늘 제주를 찾는 백수빈 에디터의 추천
제주 동쪽엔 유독 이름난 해변이 많다. 함덕, 김녕, 월정, 세화… 바다는 참 예쁘지만, 어떤 날엔 파도 소리 대신 인파 소리만 듣다 지쳐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인파에 떠밀려 점점 제주 동쪽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 하도 해변을 만났다.
“작년 가을 처음 하도 해변을 찾았는데 백사장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고, 그 큰 해변엔 저뿐이었어요. 인적이 드문 해변이거든요. 혼자 떠나는 가을 제주 여행에 제격인 곳이죠.” 추천해준 이의 말을 듣고도 제주에 과연 인적 드문 해변이 있을까 의심을 품었는데, 쓸쓸할 정도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해변 바로 옆엔 ‘철새 도래지’ 푯말이 꽂혀 있었고, 내 옆엔 정말 새들뿐이었으니까.
가만 앉아 날갯짓하는 새들을 보고 있으니 복잡했던 생각도 새들과 함께 날아갔다. 근처에 시끌벅적한 파티 없는, 조용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몇 군데 있는데 가을 타는 사람,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사람은 어서 짐 챙겨 하도로 떠나시길.
서재경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돌고래
노을 해안로
+ 게스트 하우스 ‘오늘밤’ 운영자 하성환의 추천
ⓒ사진 제공: 스냅그래퍼(instagram @snapgrapher)
“게스트들이 가볼 만한 곳을 물어오면, 돌고래를 볼 수 있는 앞바다를 추천해요. 얼마나 기다려야 볼 수 있냐고도 묻는데,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운에 달려 있어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가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차를 타고 서쪽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노을 해안로에 막 접어든 순간, 보았다. 바다 위로 참방, 매끈한 등과 꼬리를 보이고 사라지는 돌고래를. 너무 놀라 차를 급정거한 후 바다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돌고래들은 여기서 참방, 저기서 참방.
서쪽으로 점점 기우는 해에 바다는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눈부셨는데, 그 위로 돌고래 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제주를 여행하며 만난 것 중 가장 동화 같은 풍경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국제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 현재 제주 인근 해상에 120여 마리가 살고 있다. 이곳이 변하지 말아야 할 바다인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신지
고즈넉한 바다에 앉아
오조 포구
+ 플레이스 캠프 제주의 김정 디자이너 추천
“회사가 성산에 있어서 가까운 오조 포구에 자주 가요. 수영은 못 하지만 바다는 좋아하거든요. 퇴근 후에 오조 포구에 앉아 하늘을 보면 내가 제주에 산다는 실감이 나요.” 추천사만 믿고 가기엔 길이 너무 좁았다. 여기에 정말 포구가 있어? 싶은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니 짠 하고 바다가 나타났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고즈넉한 풍경. 어딘지 익숙하다 했더니,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 이상윤의 작업실로 나왔다고. 창고였던 건물을 촬영하며 개조했다가 지금은 오조리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감상소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매력은 드라마 배경지라는 게 아니라 혼자 산책하기에 좋은 고즈넉한 곳이라는 것. 텀블러에 따뜻한 커피를 담아갈 것을 추천한다.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홀짝홀짝 마시면, 그곳이 바로 나만을 위한 카페가 되니까. 참, 철새 도래지여서 늦가을부터는 차량 통행이 제한될 수 있다고 하니 때를 잘 맞추어 가야겠다.
권혜은
제주 좀 아는 사람들이 물놀이 하는 곳
판포 포구
+ 게스트 하우스 레이지템플 사장님의 추천
“여기 물빛은 날씨 좋을 땐 지중해 부럽지 않게 아름다워요. 청소 끝내고 판포 포구에서 수영하는 게 일상의 낙이에요. 여유 있을 땐 하루에 두 번씩 합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노을 보며 한 번.” 판포 포구에 처음 가본 건 4년 전. 친구가 로컬들만 아는 아지트라며 알려준 곳이었다.
동네 청년 서넛이 풍덩거리며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예쁜 해변을 놔두고 왜 다들 굳이 여기서?’ 싶었는데, 가만 보니 이유가 다 있었다.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에 물결이 잔잔해서 놀기 좋았다. 몇 년 뒤 판포 포구는 SNS를 통해 모두에게 알려졌다.
우리만의 비밀 장소 같았는데 어느새 해시태그로 만 번쯤 언급된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못내 서운했지만 포구 근처에 구명조끼 빌려주는 곳도 생기고 안전요원도 배정된 건 다행한 일. 그래도 예전의 한적함이 못내 그립다면? 피서객들이 떠난 9월에 가보시라. 원래 제주 수영은 9월이 제철이다.
김혜원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세기알 해변
+ 23년 차 제주 토박이 현요아의 추천
“인기 많은 김녕 성세기 해변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나타나는 작은 해변이에요. 성세기 아래에 붙어 있다고 해서 세기알. 인디밴드처럼 숨겨두고 저만 보고 싶은 곳이죠. 제주 동쪽에서 가장 물빛이 맑고 주변은 고요하거든요.
사실 저희 집은 제주 서쪽으로 정반대 편인데,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여행 삼아 다녀오곤 합니다.” 옆자리 후배 에디터의 영업에 물어물어 찾아갔다. 제주 바다는 어디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과연 세기알 해변은 보자마자 감탄이 터져 나온다. 이온음료처럼 새파란 에메랄드 빛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바다를 본 사람인 양 마음이 들뜬다.
워낙 물이 맑고 고기도 많아, 여름에는 스노클링 하는 여행객들이 알음알음 찾기도 한다는 곳.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무렵이 되니 인적 없이 고요하다. 트렌치코트를 걸쳐 입고 괜히 분위기를 잡으며 빨간 등대가 서 있는 세기알 포구까지 나가 봤다.
파란 하늘 위로 갈매기는 날고, 파도 소리는 철썩철썩 울리고. 멀리 수평선에서는 풍력발전기가 뱅글뱅글 돌고. 유토피아를 믿지 않은 지는 오래됐지만, 그 비슷한 곳이 지구에 있다면 바로 여기 아닐까?
권혜은
EDITOR 김신지 김혜원 권혜은 서재경 suhjk@univ.me
PHOTOGRAPHER 김윤희 studio AL, 김신지,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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