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삭발, 그 후
하다원 / 머리 길이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한 달 전,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마를 했다. 까슬까슬한 두피에 샴푸를 칠하며 머리가 자라길 기다린 지 일 년. 밤송이처럼 이리저리 뻗친 머리 탓에 내내 모자를 쓰고 다녀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두 달 전 미용실에 갔을 때만 해도 머리가 짧아서 투블럭도 파마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아 어찌나 절망스러웠던지.
나는 지난겨울, 스페인 여행이 끝난 길에서 삭발을 했다. 일 년간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후라 머리 미는 것에 별생각이 없었다. 여자 친구 중에서도 서너 명은 머리를 짧게 민 채로 학교에 다녔으니까. 여행이 끝나 돌아간 곳에서 친구들은 어쩌다 머리를 밀었는지 궁금해했지만 더는 의아해하지 않았고 잘 어울린다, 용기 있다, 정도로만 이야기를 끝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다. 오기 전 지인들에게 머리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왜’라는 질문을 융단폭격처럼 맞을까봐 조금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정류장에 마중 나온 어머니는 딸을 알아보는 데 한참이나 걸렸고, 거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본 아버지는 절에 들어가는 게 어울리겠다고 했다.
몇몇 친구들은 까칠하게 자라나오는 머리카락을 신기해하며 예술가 같다고 좋아해줬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만나던 사람과 헤어졌는지, 대단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교수님들도, 심지어 처음 보는 후배들도 조심스레 물었다. 길었던 머리를 단숨에 깎아버리고 나타난 게 주위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고 싶던 그때의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우연히 상황이 맞아떨어져 길 위에서 만난 친구가 자신이 갖고 있던 이발기로 머리를 밀어준 것뿐이었다. 머리를 기르고, 단발로 자르고, 파마하고, 빨갛고 파랗게 염색을 하는 데는 딱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저 하고 싶어서 할 뿐이지.
내가 남자였더라도 과연 그렇게 많은 질문을 받았을까. 그래도 매일같이 듣다 보니 그런 질문들에 조금씩 무뎌졌고, 적당히 대답하는 기술도 생겼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내게 이러쿵저러쿵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만은 정말이지 싫었다. 나는 머리를 밀고도 치마를 입었다. 누군가는 입고 다니는 옷이 너무 여성스럽다며 어울리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머리를 밀면 어떤 옷을 입어야 되는지 딱 정해놓은 법이라도 있는 걸까?
오지랖은 머리에서 시작해 온갖 방향으로 가지를 쳤다. 모자를 쓰면 “왜 그런 모자를 썼어”라든가, 대중없이 기르고 있는 머리를 보면 “옆머리 좀 정리하면서 기르지 그래”라며 한마디씩 툭툭 던지고 가는 게 일상. “좋아하는 남자 앞에선 이런 머리 보이면 안 되겠다”, “연애하려면 머리를 열심히 길러야겠다” 등등 내 연애 사업에 대한 막무가내 걱정까지.
사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기르는 게 좋겠다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이것 참 따뜻한 이웃들 납셨다. 그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조언이랍시고 떠들어댔지만 듣는 나는 화가 났다. 온통 내 정체성을 흔드는 말들이었다. 흔한 걱정과는 다르게 나는 머리를 밀고도 일을 했고, 운이 좋았던 건지 일을 맡겼던 사람들은 머리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는 내 머리카락이 없는 덕분에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들에 마냥 반항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못 되었다. 사람들에게 듣는 말이 싫었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 말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조금씩 갉아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달리고 속상해하면서까지 내 고집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봄에 두어 번 이발기로 혼자 머리를 민 후, 다시는 삭발하지 못했던 이유다. 달라진 게 없지는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런 충고를 들을 때 더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치마를 입지 않고, 좋아하는 남자에게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며칠 전 누군가 핸드폰을 바닥에 두고 충전하는 내게 말했다. “얘, 넌 좀 여성스러워져라. 머리 밀었다고 성격까지 그러냐?” 그저 웃고 넘어갈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은 굳어졌고,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세상에 여성스러운 머리란 게 어디 있어요!”
교환학생을 가 있는 동안, 한국에선 그렇게 흔히 들어왔던, 뿌리 염색 좀 해라, 머리가 상했으니 좀 잘라야겠다, 같은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만큼 가깝지 않아서가 아니다. 뿌리가 까맣게 자라 나오든, 삭발하고 치마를 입든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해도 나 자신이다. 누가 감히 머리 따위로 나를 재단할 수 있겠는가.
[839호 – issue]
intern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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